책상 하나가 사라지는 시간

by Just Be

상임이사, 그는 우리 회사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모든 평사원들의 '오래된 미래'였다. 화려한 스펙을 앞세워 외부에서 영입된 소위 ‘낙하산’ 인사가 아니었다. 우리와 똑같이 낡은 책상에서 신입사원으로 시작해, 수많은 경쟁과 파도를 넘어 마침내 '별'이라 불리는 임원(理事)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살얼음판 같다는 임원의 자리에서 무려 8년. 강산이 한 번 변하고도 남을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언제나 회사의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뜨겁게 자리를 지켜온 거목이었다.


하지만 영원히 그곳에 계실 것만 같았던 그의 시간에도 결국 예고된 마침표가 찍혔다. 임기 만료. 시스템상의 차가운 네 글자가 그의 30년 근속을 마무리 짓는 신호탄이 되었다.


퇴임식이 예정된 날의 아침 공기는 유난히 건조했다. 목구멍이 까끌거릴 정도였다. 나는 출근하자마자 습관처럼 탕비실에서 진한 블랙커피를 내리고, 내 자리로 돌아와 가장 먼저 HR 통합 시스템(ERP)에 접속했다. 윙윙거리는 본체 소음만이 정적을 채우는 사무실, 모니터 속 푸른 빛이 내 건조한 눈을 찔렀다.


검색창에 익숙한 숫자 조합, 이사님의 사번을 입력했다. '1994'로 시작하는 그 숫자는 단순한 식별 번호가 아니었다. 삐삐에서 스마트폰으로, 수기 장부에서 AI 시스템으로, 호황의 파도에서 구조조정의 태풍으로 넘어오는, 이 회사의 모든 격랑의 시간을 관통해 온 고유한 바코드와도 같았다.


화면에 그의 프로필이 떴다. 30년 전, 입사 지원서에 붙였던 촌스러운 넥타이 차림의 앳된 증명사진과, 지금의 희끗한 머리칼이 섞인 현재의 사진이 모니터 안에서 묘하게 겹쳐 보였다. 나는 마우스 커서를 '인사 변동' 탭으로 천천히, 아주 무겁게 옮겼다. 그리고 '상태 변경' 드롭박스를 클릭했다.


[재직(Active)][퇴직(Inactive)]


단 두 글자. 나는 엔터키 위에 검지를 올려놓고 잠시 멈칫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가벼운 플라스틱 키보드를 한 번 누르는 순간, 한 사람이 청춘을 바쳐 쌓아 올린 30년의 역사는 시스템상에서 영원히 '과거 데이터'로 분류될 것이다.


그의 출입카드는 즉시 정지되어 내일부턴 로비의 게이트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고, 그가 매일 아침 눈을 비비며 열어보던 메일 계정은 폐쇄될 것이며, 조직도라는 거대한 나무에서 그의 이름이라는 잎사귀는 흔적도 없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딸깍.


마우스 클릭 소리는 경박할 정도로 가볍고 명쾌했다. 그 소리가 텅 빈 사무실에 비수처럼 꽂혔다. 서버는 주저하지 않았고, 모니터는 일말의 감정 없이 깜빡였다. "처리가 완료되었습니다."라는 팝업창이 뜨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사람의 흔적을 지우는 일이 이토록 매끄럽고 신속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비현실적인 공포로 다가왔다. 나는 마치 살인을 저지르고 증거를 인멸한 사람처럼, 죄책감 섞인 눈으로 멍하니 모니터의 픽셀들을 응시했다. 시스템은 잔인할 만큼 효율적이었고, 그 효율성 앞에서는 30년의 땀방울도 그저 0과 1의 데이터에 불과했다.




이사님은 우리 회사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동시에 '아픈 손가락'이었다. 신입사원 시절부터 남달랐던 그의 무모할 정도의 열정은 전설처럼 내려왔다.


외환위기, 금융위기, 메르스 사태, 코로나까지 회사가 중요한 기로에 섰을 때 비상경영대책을 작성하며 밤새 화장실에서 구토를 하고, 다시 돌아와 붉어진 눈으로 묵묵히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이야기는 술자리의 단골 안주였다. 그는 회사의 가장 어두운 터널을 맨몸으로 뚫고 나온 세대였다.


특히 5년 전, 과로와 스트레스가 겹쳐 큰 수술을 받으셨을 때의 일화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각인을 남겼다. 의사도, 가족도, 회사도 모두 장기 요양을 권했다.


하지만 그는 수술 자국에 붙인 거즈가 채 마르기도 전에, 링거 바늘 자국이 시퍼렇게 멍든 팔을 이끌고 회사로 복귀했다. "내가 없으면 진행이 안 되는 프로젝트가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해진 얼굴로 회의실 구석에 앉아 있던 그의 모습은, 존경스럽다기보다는 차라리 기괴하고 처절해 보였다.


그에게 회사는 단순한 직장이 아니라, 자신이 지켜내야 할 성(城)이자 자아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생명력을 태워 회사의 엔진을 돌리는 것. 그것이 그가 배운 생존 방식이자 유일한 충성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그리고 조직이라는 거대한 생물은, 그 뜨거웠던 열정을 오래 기억해 줄 만큼 다정하거나 의리 있지 않았다.


퇴임이 결정되고 후임 임원이 내정된 지난 몇 달간, 나는 조직의 서늘하고도 잔혹한 생리를 가장 가까이서 목격해야 했다. 그것은 소리 없는 장례식과도 같았다. 주간 임원 회의 시간, 이사님이 어떤 안건에 대해 의견을 내면 좌중에는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예전 같았으면 그의 말 한마디, 숨소리 하나에도 바쁘게 펜을 놀리며 받아적던 부장들이, 이제는 볼펜 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거나 창밖의 먼 산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도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도 않았다.


"네, 그건 차기 프로젝트에서 검토해보는 형식으로 내년 업무계획에 반영하겠습니다..."


정중하지만 명백한 거절. "어차피 곧 떠나실 분인데 굳이..."라는 무언의 공기가 회의실을 부드럽게, 하지만 강철처럼 단호하게 감쌌다. 그의 말은 허공을 맴돌다 힘없이 카펫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그는 왕따를 당한 것도,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복도에서 마주치면 모두가 그에게 90도로 깍듯이 인사했고, 식당에서는 가장 안쪽 상석을 권했다. 하지만 권력의 중심, 의사결정의 핵은 이미 소리 없이 그를 비껴가고 있었다.


조직은 생존 본능을 가진 짐승처럼, '미래'가 없는 권력에게는 잔인할 만큼 빠르게 등을 돌렸다. 아픈 몸을 이끌고 돌아왔던 그 처절한 애사심조차,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유행 지난 넥타이처럼 촌스럽고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나는 회의록을 작성하며 그 쓸쓸한 풍경을 기록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저묾을 기록하는, 서글픈 사관(史官)의 심정이었다.


오후 3시, 이사님이 짐을 싸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임원실로 향했다. 명색이 인사 과장인 내가 마지막을 배웅해 드려야 했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간 임원실은 묘한 정적에 싸여 있었다.


드라마에서 보던 거창한 이사(移徙)를 상상했지만, 현실은 초라할 정도로 간소했다. 30년의 세월을 담아내는 데는 낡은 쇼핑백 두 개와 작은 종이박스 하나면 충분했다.


한때 벽면을 가득 채웠던 경영 전문 서적들과 수십 년간 모아온 서류철들은 이미 파쇄기 속으로 사라졌거나, "필요한 사람 가져가라"며 복도에 내놓아진 상태였다.


그가 챙기는 것은 손때 묻은 낡은 다이어리 몇 권, 색이 바랜 가족사진 액자, 그리고 책상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서 나온, 지금은 바뀐 옛날 회사 로고가 박힌 기념품 볼펜 한 자루가 전부였다. 그 볼펜을 쥐고 있는 그의 손등에 튀어나온 푸른 핏줄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이사님, 도와드리겠습니다."


내가 다가가 박스를 들어 올리려 하자, 그는 짐을 싸던 손을 멈추고 나를 보며 씩 웃었다. 눈가에 잡힌 주름이 오늘따라 깊은 계곡처럼 보였다.


"아냐, 이 과장. 내 짐은 내가 싸야지. 올 때도 빈손이었는데, 갈 때 너무 많이 가져가면 무거워서 못 써. 인생이나 직장이나, 결국 가볍게 나가는 게 제일 좋은 마무리야."


그는 마지막으로 텅 빈 책상 상판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쓸어내렸다. 마치 오랜 전우의 어깨를 토닥이는 듯한, 혹은 자신의 다 타버린 30년 젊음을 위로하는 듯한 손길이었다. 그 손끝에서 아쉬움인지, 후련함인지, 아니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회한인지 모를 묘한 감정이 묻어났다.


"이 과장, 30년이 참 긴 것 같지?"


그가 창밖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입사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정신 차려보니 여기 서 있어. 정말 찰나야. 눈 한번 깜빡하면 자네도 이 자리에 서 있게 될 거야. 그때 가서 후회하지 않으려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네 자신을 위해서."


그 담담한 한마디가 내 명치를 묵직하게 때렸다. 어떤 경영학 서적의 명언보다도 서늘하고 무거운, 30년이라는 전장을 살아낸 생존자가 건네는 유언 같은 조언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숙였다. 목이 메어왔다.




오후 5시, 대회의실에서 퇴임식이 열렸다. 사장을 비롯한 모든 임원, 부장급 간부들, 그리고 업무를 잠시 멈춘 수많은 직원들이 강당을 가득 메웠다. 나는 사회자석에 서서 미리 준비한 송별사를 낭독했다.


"귀하께서는 지난 30년간 투철한 사명감과 애사심으로 회사의 발전에 기여하셨으며..."


상투적이지만 무게감 있는 문장들이 내 입을 통해 마이크로 흘러나갔다. 그 단어 하나하나에 그가 흘린 땀과 눈물, 그리고 포기했던 가족과의 시간들이 담겨 있음을 알기에, 나는 목이 메지 않도록 짐짓 건조하게, 아나운서처럼 읽어 내려갔다.


송별사가 끝나고 사장님이 직접 그에게 큼지막한 황금열쇠와 화려한 꽃다발을 전달했다. 번쩍이는 황금과 알록달록한 꽃들은 그의 마지막을 축복하는 훈장 같았지만, 동시에 '이제 그만 열쇠를 반납하고 나가라'는 조직의 우아한 통보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어진 정담회(情談會). 다과가 차려진 테이블 주위로 임원들이 모여들었다. 분위기는 묘하게 들떠 있었다. 그들에게 이 자리는 이별의 슬픔보다는 '행사'의 연장이었다.


"이사님, 이제 골프나 실컷 치시겠네. 부러워 죽겠어. 우린 언제 은퇴하나."


"사모님이 제일 좋아하시겠어. 그동안 너무 바쁘셨잖아. 여행도 좀 다니시고, 푹 쉬세요."


임원들은 와인 잔을 부딪치며 속없는 농담들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웃음소리에는 떠나는 동료에 대한 아쉬움보다, 경쟁자가 사라졌다는 안도감, 그리고 자신들은 아직 이 성(城) 안에 남았다는 묘한 우월감이 섞여 있었다.


그 가벼운 말들 속에서, 이사님이 몸을 바쳐 지켜냈던 30년의 치열함은 공중으로 흩어지는 담배 연기처럼 허무하게 휘발되는 듯했다. 이사님은 그 농담들에 그저 "허허, 그래야죠" 하고 웃으며 잔을 비웠다. 그 웃음이 너무 쓸쓸해 보여 나는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잡은 이사님의 인사는 짧고 담백했다.


"행복했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회사가 더 단단해지기를 멀리서 응원하겠습니다. 건승하십시오."


그의 목소리엔 미련도, 원망도, 과장된 감정도 없었다. 그 담백함이 오히려 화려한 꽃다발보다 더 긴 여운을 남겼다. 박수 소리가 쏟아졌고, 그렇게 30년의 마침표가 찍혔다.


이사님은 정담회에 참석해준 모두와 악수를 하시고 전용 차량을 타고 마지막 퇴근길에 올랐다. 이사님의 운전직 직원도 오늘만큼은 말끔한 정장에 넥타이까지 메고 이사님을 맞았다. 그렇게 그는 떠나갔다.




퇴임식이 끝나고 모두가 떠난 저녁 7시. 나는 퇴근하려다 잠깐 멈추고 불 꺼진 임원실 앞을 서성였다. 홀린 듯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인 잃은 책상은 묘하게 커 보였고, 동시에 버려진 섬처럼 고독해 보였다.


나는 이사님의 책상 가까이 다가갔다. 명패가 치워진 자리에는, 주변보다 조금 더 짙은 색의, 네모난 나무 자국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햇빛에 바래지 않은 그 사각형의 흔적. 30년의 영광과 고뇌, 그 치열했던 전투, 수많은 결재 서류와 밤샘의 흔적들, 그리고 오늘 받은 황금열쇠의 화려함마저도 결국 고작 이 사각형의 먼지 자국 하나로 요약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것이 직장인의 성적표인가. 이것이 우리가 목숨 걸고 지키려던 자리의 실체인가.


나는 조심스럽게 그 빈 의자에 앉아보았다. 최고급 가죽 의자는 아직 주인의 체온을 기억하는 듯 미지근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창밖으로 펼쳐진 서울의 화려한 야경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빌딩의 불빛들. 저 불빛 하나하나가 야근하는 누군가의 생명력을 태우고 있을 것이다.


그 순간,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지금 한창 일할 나이, 입사 9년 차 이 과장. 매일 아침 전쟁 같은 지하철을 뚫고 출근하고, 보고서 한 줄에 일희일비하며, 승진과 평가에 목을 매는 나. 때로는 회사가 내 인생의 전부인 양 착각하고 충성하다가도, 때로는 회사가 나를 갉아먹는다고 분노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나.


이사님의 저 빈 책상은, 결국 내가 도달해야 할 미래였다. 나 역시 언젠가는, 아무리 발버둥 치고 성과를 내도, 결국 이 시스템 밖으로 밀려날 것이다.


내가 밤을 새워 작성한 수많은 기획안들은 휴지통으로 들어갈 것이고, 내가 치열하게 지켰던 이 책상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앉아 낯선 이름의 명패를 올릴 것이다. 내가 없어도 회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어쩌면 더 잘 돌아갈 것이다. 그것은 슬픈 일이 아니라, 거스를 수 없는 조직의 섭리이자 자연의 이치였다.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듯한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렇다면, 끝이 정해진 이 유한한 조직 생활에서 나는 과연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그저 소모품처럼 쓰이다가 버려질 운명이라면, 지금 나의 이 고군분투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금까지 나는 회사가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더 높은 연봉, 더 빠른 승진, 더 멋진 커리어, 정년까지의 안정감. 하지만 떠나간 이사님의 뒷모습과 텅 빈 책상은 내게 전혀 다른 차원의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너는 이 텅 빈 책상만 남기고 떠날 것인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남길 것인가.'


시스템상으로 이사님은 사라졌다. [퇴직(Inactive)]. 그 코드는 돌이킬 수 없다. 그의 책상은 내일이면 깨끗이 닦여 새로운 임원을 맞이할 것이다. 물리적인 흔적은 완벽하게 지워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가 IMF 시절 구조조정의 칼바람 속에서도 후배들을 지키기 위해 임원진과 싸워가며 만들었던 고용 안정 제도가 여전히 우리를 지켜주고 있음을.


그에게 호되게 혼나며 "일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라고 배웠던 팀장님들이 이제는 회사의 허리가 되어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음을. 아픈 몸을 이끌고 링거 붕대를 감은 채 출근했던 그의 뒷모습이 우리에게 심어준, 일에 대한 엄중하고도 비장한 태도가 여전히 이 사무실 공기 속에 입자처럼 부유하고 있음을.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태도'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엑셀 파일에도, 인사 기록 카드에도, 퇴임식의 화려한 송별사에도 적히지 않는,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각인된, 썩지 않는 유산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끼익 소리를 냈다. 어둠 속에서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나는 이 회사에 내 뼈를 묻겠다는 맹목적인 충성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회사가 나의 모든 것을 책임져 줄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도 버릴 것이다. 회사는 나를 이용하고, 나도 회사를 이용한다. 그것이 계약 관계의 본질이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 동안, 내 몫의 시간을 밀도 있게 태우기로 했다. 그것은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다. 이사님의 말씀처럼, 나 자신을 위해서다. 내 삶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보내는 이곳에서, 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다. 껍데기만 남은 경력이 아니라, 알맹이가 꽉 찬 경험을 남기기 위해서다.


먼 훗날 내가 이 문을 나설 때, 쇼핑백 두 개에 담길 물건은 초라할지라도, 내가 이곳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위로로, 누군가에게는 단단한 배움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그래도 그 사람, 참 괜찮은 선배였어'라는 믿을 수 있는 기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나는 회사의 부품이 아니라, 회사를 구성하는 '역사(History)'의 일부가 되어야 했다. 비록 그 역사가 인사 시스템에서는 '이OO, 근무 기간 20XX~20XX'이라는 한 줄로 요약될지라도,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마음속에서는 지워지지 않는 문장으로, 따뜻한 온기로 남을 수 있도록.


임원실 문을 열고 나왔다. 오늘따라 야근하는 동료들의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전화벨 소리, 복사기가 윙윙 돌아가는 소리가 소음이 아니라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심장 박동처럼 생생하게 들려왔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우주를 지키며 고군분투하는 사람들. 그들의 등이 오늘따라 애틋하게 보였다.


나는 다시 내 책상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다음주 연수에 참여할 복직직원들을 위한 교육 자료를 다시 펴 들었다. 언젠가 사라질 책상이고, 언젠가 지워질 이름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자리가 나의 우주였다. 나는 그 우주를 조금 더 정성껏, 조금 더 진심을 다해 가꾸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먼저 길을 떠난 선배에 대한 존경이자, 언젠가 그 길을 따라갈, 그리고 홀로 남겨질 미래의 나에 대한 예의일 것이기에. 모니터 옆에 붙은, '오늘 할 일'이 적힌 포스트잇이 오늘따라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다시 마우스를 잡았다. 나의 시간은 아직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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