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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냥 Sep 17. 2023

다래주를 담그다

살아가는 이야기

  다래 과실주를 담갔다. 올해로 세 번째 담그는 과실주다. 4월에 산딸기를 시작으로 6월엔 복분자를, 그리고 오늘은 토종 다래가 주재료다.


  다래는 어릴 적 아버지가 산에 나무하러 가면 따오던 산 열매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가마솥 밥을 짓던 때였다. 시골에선 여름엔 땔감이 귀했다. 집에 땔감이 떨어질 때가 되면 아버진 아침부터 분주했다. 손수레에 지게와 도끼, 낫 등을 싣고 엄마가 싸준 도시락과 막걸리 한 병을 챙길 때면 우리 남매도 덩달아 들떴다. 만반의 준비를 끝낸 뒤 출발하려는 아버지를 향해 우린 다래 따다 달라며 목청껏 외쳤다. 그럴 때면 엄마는 아버지 힘드시니까 그런 부탁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셨다.

  아버진 해가 꼴딱 넘어가고 어둑해져야 돌아오셨다.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우리는 우르르 마당으로 달려가 나뭇단이 한가득 실려있는 손수레 주변을 돌며 둘레둘레 살폈다. 드디어 나뭇단 사이에서 아버지의 옷가지를 발견했다. 그 옷가지 속엔 다래가 담뿍 들어있곤 했다.

  엄마는 말랑한 것과 단단한 것을 구분한 뒤 말랑한 걸 우리 앞에 내밀었다. 우린 정확하게 개수를 세어 똑같이 나누었다. 단단한 다래를 따로 챙긴 엄마는 슬그머니 부엌으로 가져가셨다. 그리곤 며칠 뒷면 뒤꼍 선반 위에 새로운 과실주가 올려지곤 했다.

  엄마는 술 담그는 걸 좋아하셨다. 봄이면 산딸기와 자두, 살구, 앵두로 담그고, 여름이면 머루와 다래가 뒤를 이었다. 가을이면 대추와 도라지, 더덕주가 새롭게 선반 위에 올려졌다. 그렇게 담근 과실주는 봄부터 가을까지 논일 밭일을 품앗이하는 동네 분들의 새참과 저녁 밥상 자리로 올려졌다. 그리고 동네에서 잔치가 열리거나 동네 분 생신을 챙겨야 하는 날엔 술 단지 중에 가장 좋은 것으로 한 병 챙겨 선물로 가져가곤 하셨다.

  그날도 그랬다. 남자친구를 부모님에게 소개하기 위해 고향 집으로 초대하던 날, 엄마가 직접 담근 귀한 술은 어김없이 저녁 밥상 위에 올랐다. 예비 사윗감을 맞은 아버진 딱히 이런저런 말씀이 없으셨다. 그저 작은 주전자에 담긴 술을 손수 따라줄 뿐이었다. 말없이 따라주고 또 말없이 받아먹으며 남자친구는 거의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취기가 올랐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취한 남자친구는 끝내 엉금엉금 기어 밖으로 나가 수돗가에서 바가지로 물을 머리에 끼얹으며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그리고 맏사윗감으로 합격 도장을 받았다.

  다음날 엄마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남자친구에게 말을 건넸다. 자네 그 술을 어찌 다 받아 마셨나. 더는 못 마신다고 빼기라도 하지. 그 많던 술 단지가 동났어. 속은 괜찮나? 남자친구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속이 울렁거려 입을 벌릴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나. 그 많은 술을 도대체 어디서 조달해왔는지 다만 그것이 궁금했었노라고, 나중에야 겨우 물어보았을 뿐이다.

  엄마는 그 후로도 시시때때로 술을 담갔다. 명절 차례상에 올리고 손님상에 올리고 농사철에 쓰고 나면 술 단지는 수시로 비워졌고 또 해마다 새롭게 채워지곤 했다.


  산딸기로 담근 술 단지를 열어 남편에게 맛보라며 건네주었다. 한 모금 들이키더니 예전의 그 맛은 아니지만 제법 깊은 맛이 난단다. 다시 복분자주를 건네주었다. 맛은 진한데 아직 덜 익어 얕 맛이 난다며 인상을 찡그렸다. 술맛을 모르는 나로선 그저 그런가 보다 할밖에 달리 대꾸할 말이 궁색해졌다. 시큰둥한 내 표정을 읽었는지 한 마디 덧붙인다. 조금만 더 익으면 장모님이 담그셨던 그 술맛이 나겠는걸. 씩 웃는 표정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나 보다.

  다래 주 담그고 남은 다래를 입에 넣어본다. 시큼한 맛 뒤로 달콤한 맛이 입안에 오래 머무른다. 다래를 삼키는 목 안쪽으로 찐득한 그리움이 함께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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