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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냥 Nov 17. 2023

돌담

살아가는 이야기

  모처럼 가족 나들이로 찾은 외암마을. 입소문답게 마을은 옛 정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정승이 살았던 마당 넓은 기와집이며 옹기종기 모여있는 초가집도 예전 고향 동네와 비슷해 마치 고향을 찾아온 듯 정겨웠다. 초가집을 둘러싼 돌담길을 따라 걷는 동안 마음은 이미 내 고향 동네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릴 적 고향 집은 동네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큰길에서 골목으로 50M 정도 더 들어가야 했다. 골목길은 옆집과 뒷집을 구분하는 담이 놓여있는데 그 담은 돌로 담을 쌓은 돌담이었다.

  70년대엔 전국적으로 벌어지는 새마을 운동이 일어났고 우리 동네도 예외는 아니었다. 초가집이 대부분이었던 동네는 볏짚을 얹었던 지붕을 걷어내고 슬레이트를 얹었으며, 돌담을 허물고 시멘트로 담을 세웠다. 우리 집도 지붕은 고쳤으나 웬일로 돌담은 그냥 놔뒀다. 난 다른 집처럼 시멘트로 말끔하게 담을 세우면 좋겠는데 왜 그냥 돌담으로 놔두는지 못내 못마땅했다.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시멘트 담장 아래로 꽃밭도 가꾸고 과일나무도 심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가끔 엄마에게 뾰로통한 표정으로 우리 집은 왜 돌담을 허물지 않느냐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돌담 안쪽은 작은 텃밭이 있어 여러 작물을 심고 가꾸었다. 귀퉁이엔 장독대와 김장독을 묻는 움막이 있고 각종 과실 나무도 심겨있다. 난 그곳에서 동생들과 소꿉놀이를 하고 식물들도 관찰하며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다. 하지만 골목길을 지나던 동네 어르신들이 돌담 사이로 들여다보며 아는 척할 땐 마치 비밀을 들킨 것 같아 괜히 싫었다. 그런 날이면 담은 언제 바꿀 거냐며 공연히 엄마에게 투정을 부렸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도 돌담은 여전히 내 신경을 거슬렀다. 하지만 그때쯤은 우리 집이 다른 집에 비해 형편이 많이 안 좋다는 것을 알게 된 때라 더는 불만을 드러낼 수 없었다. 돌담은 내가 직장 생활을 할 때까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서울에 올라와 직장에 다니며 휴가나 명절 때 고향으로 가는 길은 사뭇 설레었다. 버스에서 내려 동네까지 걸어 들어가는 신작로 양쪽으로 벼 이삭이 여름엔 초록 물결을 이루었고 가을엔 가을 냄새가 은은히 풍겨오곤 했다. 한껏 들뜬 마음으로 동네에 다다라 골목으로 들어서면 여지없이 보이는 검은 돌담은 지난 세월을 말해주듯 한쪽이 무너져내려 집 뒤꼍 텃밭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곳엔 엄마가 밭의 풀을 뽑고 있을 때도 있고 장독대에서 돌담 위로 늘어진 호박 넝쿨을 정돈할 때도 있었다. 마치 엄마는 늘 그 자리에 계셨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난 예전 동네 어르신들이 엄마 계시냐 묻던 그때처럼 엄마를 힘차게 부르곤 했다.

  남자친구를 부모님께 인사드리기로 했을 때다. 결혼이란 말만 나오면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가겠다며 부모님의 입을 틀어막던 나였기에 언제쯤 오겠냐며 기대에 찬 목소리로 재촉하셨다. 난 조건을 제시했다. 돌담을 치우고 시멘트 담장을 세우면 그때 데리고 가겠노라고.

  엄마는 그날부터 날마다 아버지를 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움쩍도 안 하고 더는 말도 못 꺼내게 하셨단다. 아무리 설득하고 반 협박하다시피 해도 아버지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아버지의 고집에 두 손 든 엄마는 나름의 계획을 짰다. 혼자 손수레에 돌담의 돌을 몇 개씩 옮겨 담아 동네 뒷동산으로 실어 나르기 시작한 것이다. 돌덩이가 무거워 많이 싣지도 못하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몇 날 며칠을 옮기니 돌담 있던 자리가 휑해지기 시작했다. 고집을 앞세우던 아버지도 더는 어쩔 수가 없으셨던지 경운기로 돌들을 옮겨 몇 번 만에 돌담이 사라졌다. 시멘트 담장이 세워지자마자 엄마는 곧바로 전화하셨다. 이제 남자친구 데리고 와도 된다고.


  세월이 흘러 옛집을 허물고 집을 새로 지었다. 돌담이 있던 자리와 텃밭이 있던 자리엔 창고가 들어섰고 널찍했던 마당으로 텃밭이 옮겨졌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모두 사라진 집엔 부모님 두 분만 덩그러니 남아 계시더니 십여 년 전 차례로 두 분 모두 돌아가셨다.

  요즘도 가끔 꿈속에서 나는 예전 초가집 부엌에 앉아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도 하고 툇마루에 앉아 초록 들녘을 하염없이 내다보기도 한다. 이젠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어릴 적 고향 집이 새삼 그리운 것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부모님인지 아니면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의 한때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도 고향 집을 떠올리면 돌담 위로 넝쿨 늘어진 호박 줄기 사이로 어른 주먹만 한 호박이 달린 풍경과, 돌담 위에 앉아 졸던 고추잠자리를 잡아달라며 보채던 동생들과, 돌담 안에서 텃밭을 손보던 엄마의 모습이 그려진다.

  외암마을 돌담길을 꺾어 돌다 문득 멈춰 선 초가집 앞, 돌담 넘어 부엌에서 엄마가 문 활짝 열며 어서 오라고 손짓할 것만 같아 오래도록 서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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