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좋아하는 색이 있다. 마음에 이끌려 좋아하게 된 색이 있고 어떠한 연유로 인해 그 색이 마음으로 들어 온 경우 등 좋아하게 된 계기는 다양하다.
심리학에선 색이 갖는 특성을 구분하기도 한다. 파란색은 타인에게 신뢰감을 주는 효과가 있고 빨간색은 적극적인 모습으로 비치며, 분홍색은 부드럽고 낭만적으로 보이고 노란색은 따스하고 활기차게 보인다고 한다. 이 외에도 색깔마다 다양한 특성이 있어 어떤 색을 좋아하는가에 따라 사람의 성격을 가늠하기도 한다.
이 책은 출판사 푸른사상에서 작가 열 명이 매년 새로운 주제로 산문집을 출간하는 시리즈 중 일곱 번째 나온 신간이다. 그러니까 일곱째 자식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번 주제는 ‘색’이다. 『여자의 욕망엔 색이 있다』. 제목으로만 보면, 욕망과 색이 연결되어 뭔가 짜릿하고 야시시한 내용이 들어있을 것만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진 않다. 色이란 한자어가 절대 그런 오해는 하지 말라고 꼬리표처럼 붙어있다. 세속의 욕망이란 단어 속에 숨겨진 色氣에서 氣자 빼고 色만 남아 뜨겁고 따스한 열정의 色이 되었다.
열 명의 작가는 각자 좋아하는 색을 이야기로 풀었다. 색 안엔 어릴 적 성장의 아픔이 있고 사제 간의 존경과 사랑이 있으며 지난한 인생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리움이 스며있어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한편이 아릿해지는 색, 시간과 사연이 쌓여 자신의 색깔로 점착된 색 등 사연 또한 형형색색으로 찬란하다.
이중 내게 문학의 길을 열어주신 최명숙 교수님의 작품이 있다. 「봄은 노란색으로 문지방을 넘어왔다」 「벽람색, 서늘한 그리움으로」 이렇게 두 편이다. 어릴 적 봄앓이로 아파 학교에 가지 못하고 며칠을 앓고 일어났을 때 처음 눈에 들어온 노랑나비를 사연으로 풀어내는 「봄은 노란색으로 문지방을 넘어왔다」. 지금도 노란색 꽃을 보거나 노란 나비를 보면 그 시절의 아릿한 그리움에 휩싸인다는 이야기다.
이야기 중 이런 내용이 있다. 새봄에 처음으로 보는 나비가 흰나비면 식구 중 누가 죽는다는 말을 듣고 한참 아프던 중 노란 나비를 먼저 보게 되어 안심되었단다. 난 이 문장 앞에서 가슴에 싸한 아픔이 일었다. 어린 나이에 아파 누워있으면서도 어떻게든 희망을 보려는 애틋한 마음이라니.
두 번 째 「벽람색, 서늘한 그리움으로」는 암으로 세상을 떠난 스승을 향한 사모곡이다. 원문에 이런 내용이 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처럼 특별한 게 또 있을까.(p22) 홀로 견디며 싸워야 했던 현실의 고단함을알아주고 다독여주고 살펴주는 은인 같았던 스승. 성경 「열왕기하」에 나오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처럼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수십 벌의 옷 중 여러 벌이 벽람색이었단다. 그 옷을 입으며 스승을 기렸고 심상(心喪)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글이 주는 힘은 작가 내면의 감정들을 들여다보며 그 감정들이 독자에게 전해져오는 에너지다. 슬픔이 승화되어 힘으로 전환되고 그 마음들이 단단하게 다져져 단어로 문장으로 독자에게 들어온다. 타인의 고통이 달콤하게 느껴진다는 건 그 고통을 공감하고 받아 안았으며 내 안에 삶의 에너지로 채웠다는 것이다.
이 책을 덮으며 가만히 생각해본다. 난 어떤 색을 좋아하는 걸까. 이런저런 이유로 몇 가지 색을 꼽아본다. 어린 시절 눈앞에 끝없이 펼쳐지던 하얀 눈 세상, 구름 한 점 없던 파란 하늘과 한 줄기 바람에 일렁이던 초록 들판. 그리고 큰길가 작은 점처럼 사라질 때까지 한들거리던 할머니의 연보랏빛 한복 치맛자락.
하얀색과 파란색, 초록색은 내게 꿈이었고 동심이었고 성장이었다면 보라색은 아픔이었고 쓸쓸함이었으며 영원한 그리움이다. 보라색 제비꽃을 보면 할머니가 만들어주던 제비꽃 반지가 생각나고, 연보라색을 보면 손녀 학비를 위해 타향살이하러 떠나던 뒷모습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제자리에 서서 마냥 손을 흔들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움의 또다른 아이콘, 보라색. 아,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