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아 가족 이야기
♣ 이 글은 13년 전에 쓴 글이며, 가톨릭 신문에 실렸던 원문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겨울이 다가옵니다.
화려했던 만물은 숨을 죽인 채 모든 것을 순백으로 되돌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새롭게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는 준비를 하면서 순백의 마음으로 돌아갈 채비를 합니다.
언젠가 신부님께서 강론 중에 신자들을 향해 “사랑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질문을 받은 요한반(성남동성당 장애아주일학교)의 한 엄마는 순간 너무 많은 생각이 떠올라 한마디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고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장애아이를 키우는 저에게 사랑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제 아이가 처음 장애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절망감
아픈 아이를 돌보며 하루에도 몇 번씩 불같이 타오르는 분노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르던 원망과 절규
모든 것이 내 탓인 것만 같아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자책
아이를 바라보며 수도 없이 눈물 흘리던 상실감
아이와의 힘든 싸움으로 뒷전으로 밀려나 있던 가족들의 한숨
이런 감정들이 뒤섞여 만신창이가 된 자존심
주님
저에게 아이를 향한 사랑은 막막하고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한없이 세상을 향해 분노하고 끝없이 주님을 원망하던 저에게 요한반은 상처투성이인 저의 보이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었고 나를 가장 힘들게 하던 아이를 따뜻하게 품어주었습니다.
울고 있는 내 아이에게 온 마음으로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말 못 하는 내 아이에게 사랑이란 말을 가르쳐주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내 아이에게 주님의 말씀으로 사랑을 전파하는 생생한 사랑의
현장을 보여주었습니다.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실천하는 그 모습들이 저에겐 또 다른 고통으로 다가왔습니다.
아픈 내 아이를 향해 똑바로 하라고 윽박지르고
왜 못하느냐고 다그치는 것이 아이를 제대로 키우는 거라고
그래야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거라고
날마다 악에 받쳐 끝도 없이 소리치던 제 모습이 반추되어 더욱 저를 아프게 했습니다.
주일마다 요한반에 아이를 보내며 차츰 밝은 웃음을 보이는 달라진 내 아이를 보면서
아픈 아이를 더욱 아프게 했던 내 행동들에 대해 뼈저리게 후회하였습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참회의 눈물로 나를 반성하고 기도 속에서 힘을 얻고
아이와 함께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을 다졌습니다.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아이의 언어로 주님과 소통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요한반과 함께 한 십 년의 시간 속에서 어느덧 아이는 주님이 바라보시기에 좋은
아이로 성장하였고 저와 저희 가정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 되었습니다.
이젠 천사의 마음을 가진 아이와 함께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슬픔과 기쁨, 두려움과 용기, 절망과 희망, 불안과 평화 이런 모든 감정이 다 녹아들어
사랑으로 재탄생된다는 것을 주님과 요한반을 통해 깨닫게 되었기에 오늘도 묵묵히
아이와 함께 세상 속으로 열심히 걸어가고 있습니다.
날마다 밀알 한 알만 큼씩 자라나는 아주 작은 믿음이지만 내 아이가 조금씩 세상과 소통하는 순간들을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이끌어주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힘든 순간순간 주님께선 견뎌낼 수 있는 시련만 주신다는 믿음으로 주님이 주신
제 십자가의 길을 겸허히 걸어가겠습니다.
가끔 제 아이를 향한 뭇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아이의 미래에 관한 불안함에 또다시 흔들리고 주저앉으려 할 때
주님께서 제 아이의 어깨에 손 얹어주시고 힘든 걸음을 살펴 이끌어주시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누군가 내 아이에게 네 엄마에게서 무엇을 배웠니? 하고 묻거든
내 엄마에게서 사랑을 배웠어요...라고 대답하게 하소서.
누군가 내 아이에게 네 엄마에게서 무엇을 느꼈니? 하고 묻거든
내 엄마에게서 언제나 사랑을 느꼈어요...라고 대답하게 하소서. 아멘
(특수교육기관 벽면에 붙어있던 시)
요한반 사랑합니다.
(2011년 11월 26일 토요일, 요한반 10주년 미사 시간에 낭독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