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연극 보러 갈래? 묻는 나에게 멀뚱한 표정으로 왜요? 되묻고는 내 표정을 살핀다. 그다음 코스는 어찌 되냐는 무언의 질문이 담겨있는 눈빛. 연극 끝나면 카페 갈 거야. 어떻게 할래? 갈래요! 연극 보고 카페 가고 싶어요!
작은애와 종종 문화생활을 한다. 기회 닿을 때마다 공연장과 영화관을 찾곤 한다. 그때마다 지루함에 몸을 뒤틀면서도 카페에 가기 위해 인내심을 발휘하는 어른아이. 몇 년 전에 큰맘 먹고 백조의 호수 발레를 보러 간 적이 있다. 공연비가 제법 들어가는 공연이었지만 작은애에게 다양한 문화를 접해주고 싶었기에 강행했다. 그러나 녀석은(이제부터 난 녀석이라 불러야겠다) 발레 공연 내내 무대 대신 내 얼굴을 쳐다봤다. 앞을 보라고, 무대를 보라고 눈짓해도 그때뿐이었다. 녀석에겐 이해 불가의 무대였던 거다. 음악에 취해 자다 깨도 같은 장면의 반복에 녀석은 당황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들이 무대 위에서 말 한마디 없이 빙글빙글 돌거나 왔다 갔다만 하고 있으니 그걸 어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표정에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었다. 저게 뭐예요? 언제 끝나요? 속으로 쿡쿡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후론 대화 없이 이뤄지는 공연은 녀석과 동행하지 않는다.
어제 본 연극은 「별이네 헤어살롱」이다. 자식을 키우느라 자신의 꿈을 포기한 60대의 어머니가 꿈을 찾기 위해 도전하는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다.
시골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별이 엄마는 딸과 전화 통화하는 게 유일한 행복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소소한 것까지 딸에게 전화를 걸고 받는다.
별이 엄마는 IMF 시절 남편이 사업에 실패한 뒤 미용실을 차려 자녀를 키워냈다. 자신의 꿈도 모두 포기한 채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 일평생을 희생한다.
유쾌할 줄 알았던 내용은 의외로 아픔이 가득했다. 자신에게 의지해 늙어가는 엄마가 부담스러운 딸은 엄마에게 소리친다. 제발 엄마의 꿈을 찾아 새 인생을 살라고. 엄마는 그런 딸의 모습에 서운하기만 하다.
-엄마, 나는 엄마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엄마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내 이름을 잃어버리고 꿈마저 포기한 채 그저 엄마로 늙는 모습이 내 미래라고 생각하니 끔찍했어요.
-엄마도 엄마의 이름이 있고 꿈이 있고 좋아하는 게 있었을 거잖아요.
흔히 볼 수 있는 엄마의 인생. 그렇지 않은 삶도 물론 많다. 하지만 대부분 엄마는 자식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며 자식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람으로 여긴다. 가진 것 다 내어주었고 되돌릴 수 없다 해도 아깝지 않았던 시간이고 후회되지 않는 시간. 그러나 엄마 품을 벗어난 자식들은 자신이 딛고 일어난 껍데기가 불편하기만 했던가. 자꾸 새로운 인생을 살라고만 한다.
-엄마, 이젠 엄마를 이해할 수 있어요.
-나도 엄마 같은 엄마가 될 용기가 생겼어요.
-엄마, 사랑해요.
극 마무리에선 엄마는 젊은 시절 꿈이었던 미용대회에 나가게 되고 상을 받아 해외여행을 간다.
연극이 끝난 뒤 공연장 밖으로 나오자마자 녀석이 내 손을 잡으며 하는 말. 연극 끝났는데요. 이제 어디 갈 거예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어디 가고 싶은데? 엄마, 카페 가야지요? 그래, 가야지. 오로지 카페에 가기 위해 엄마의 시간을 기다려준 너.
나는 너에게 내 인생의 반을 내어주었고 남은 삶도 내어줄 참이다. 아니, 내어준다기보다 그냥 너와 함께 어울렁더울렁 살아갈 참이다. 가끔 이렇게 살아가는 게 옳은가 싶어 가슴 철렁 내려앉기도 하지만, 괜찮다. 우리도 충분히 우리만의 방식으로 즐겁게 살아가도 되지 않겠나.
만약 네가 나에게 엄마도 꿈이 있었어요? 이제라도 엄마 꿈을 찾아보는 게 어때요? 묻는다면, 난 지긋이 너의 눈을 바라보며 말하련다. 난 네가 특별하다는 걸 알게 된 그 순간부터 너와 함께 조용히 늙어가는 게 꿈이 되었다고. 그렇게 사는 것도 제법 의미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