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삼수생의 회고록 2
고사장을 잘 배정받기 위해 제2외국어 영역을 응시했으므로 그 시험이 끝난 뒤에야 바깥공기를 쐴 수 있었다. 밖에선 부모님이 대기하고 있었다. 시험 잘 봤냐는 물음에 아무 답변도 할 수 없었다.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간 자리에서도 분위기는 무거웠다. 그나마 지구과학이 43점으로도 1등급이 나온 게 위안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국어 영역에서 2등급을 받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나중에 성적표를 받고 그냥 울었다. 수학 3등급 맞은 것도 이렇게 분하지는 않았다. 수학이야 원래 못했던 과목이니까 그러려니 해도, 국어는 당연히 1등급이 나올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진학사에 실채점 성적을 입력해야 했다. 가채점 판에는 국어가 1등급이었는데, 국어 등급이 하나 떨어지자 칸수가 완전히 무너졌다. 내 성적으로는 서성한도 못 갈 상황이었다. 심지어 가채점으로는 충분히 합격선이라 논술에 안 간 대학이, 실채점 이후 4칸이 되어 버리기도 했다.
그때부터 원서 영역은 자포자기했다. 대신 재수학원을 알아봤다.
과탐 성적이 예상보다 잘 나와서(물리는 의외로 20번 하나만 틀렸는지 1등급이었다) 강대 쓸 성적은 됐다. 그러나 집에서 강남까지 통학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리여서 집에서 멀지 않은 독학재수학원을 다니기로 결정했다.
재수하기로 결심은 했지만, 재수는 무서웠다. 내 주변에 재수를 한 사람 자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떠올린 대안은 PEET였다. 전적대 학벌이 조금 낮아도 약대 편입에만 성공하면 전문직이 보장된다고 생각하니 할 만해 보였다. 그래서 PEET라는 최후의 희망을 부여잡고 가군과 나군 원서를 썼다.
그리고 타이밍 맞게 코로나가 터졌다. 처음에는 금방 지나갈 병인 줄 알았는데 확진자는 점점 늘어났다. 결국 학원 등록을 미뤘다.
하지만 집에 있으니 아예 공부를 안 하게 돼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스터디카페였다. 스카에서 잠깐만 공부하다 집에 돌아오는 생활이 며칠 반복됐다.
2020년 2월 10일이었다. 그날도 패턴이 그랬다. 비몽사몽인 채로 스카에 자리를 잡고 공부를 하던 그때, 02로 시작하는 전화가 왔다.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본론을 말했다.
안녕하세요, ○○대 입학처입니다.
***님께서는 2020학년도 ○○대 화학과 정시 전형에 추가 합격하셨습니다.
엄마는 반수를 할 바엔 차라리 쌩재수를 하거나 피트에 전념하라고 누누이 말씀하셨다. 학교에 등록한다는 것은 재수를 포기하고 약대 입시에 뛰어드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재수와 피트 중 무엇에서 더 괜찮은 결과가 기대되느냐의 문제였다.
나는 확통에서 배웠던 기댓값 공식을 떠올렸다.
$E\left(x\right)=\sum
_{i=1}^n\combi{x}_i\combi{p}_i$E(x)=n
∑
i=1
xi
pi
풀어서 설명하자면, 어떤 선택을 한 경우의 기댓값은 ‘각 사건이 벌어졌을 때의 이득’과 ‘그 사건이 벌어질 확률’을 곱한 것을 전체 사건에 대해 합한 값으로 정의된다. 이 공식을 내 상황에 대입해 보았다. 선택도 두 가지, 각 선택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사건도 두 가지씩이었다.
각 결과에 따라 기대할 수 있는 이득의 크기는 쉽게 계산되었다. 관건은 확률이었다. 재수해서 성공할 확률, 그리고 약대 편입에 성공할 확률. 이를 추산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직감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너 원래 국어 2등급 맞던 실력이었냐?
나는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었다.
아니, 내 실력대로 쳤으면 못 해도 1컷이지.
6모 92점, 9모 96점, 수능 86점. 이중 내 실력을 정확히 반영한 것은 9모 성적이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6모는 어려웠으니까 92점이 나왔을 뿐이다. 미시건전성 지문과 개체성 지문이 동시에 출제되었기 때문에 1컷이 87까지 내려왔던 시험이니 말이다. 이렇게 따져 보니 6모 성적과 9모 성적이 사실 비슷한 수준이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선택은 끝났다.
나는 평소 실력에 비해 수능을 망쳤으니까, 재수하면 무조건 성공할 것이다!
‘무조건’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조심히 다뤄져야 하는지 깨닫지 못한 채 그렇게 단정 짓고 말았다.
“등록 의사가 있으십니까?”
“아니요.”
긴 도출 과정에 비해 참 간결한 결론이었다.
입학처 직원은 등록 의사를 재확인했다. 나의 대답은 똑같았다.
“어떤 이유로 등록을 포기하시는 건가요?”
이런 질문에는 보통 다른 학교에 진학하기로 했다고 답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게는 다른 학교가 없었다.
“저, 재수할 겁니다.”
3칸짜리를 합격시켜 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결국 나는 ○○대에 재수 선언을 했다. 그러자 등록 포기 의사는 번복할 수 없다는 식의 형식적인 멘트가 흘러나왔다. 알겠다고 하니 전화가 끊겼다.
그렇게 재수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