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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두 Sep 29. 2024

양가적 감정 上

어느 삼수생의 회고록 3


이번에도 딸아이가 직접 쓴 글 올립니다.

딸이 수험생 카페에 올렸던 글을 여기 옮기다 보니, 그걸 왜 딸이 반대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불과 2년 전인데 그새 입시 분위기도 달라진 것 같고, 글 자체가 수험생 아니면 좀 지루할 듯싶어서요.

하지만 당초 계획대로, 삼수 생활의 큰 줄기가 되는 글 몇 편은 계속 올리겠습니다.



6월 모평을 친 다음 날, 학원은 어수선했다. 애초에 큰 시험이 끝난 직후이니만큼 쌤들도 면학 분위기를 엄하게 잡지 않는 듯했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눈은 해설 강의를 보고 있었지만, 정작 나를 사로잡은 것은 메가스터디 채점 결과였다. 대충 예상 등급 컷이 안정화된 뒤에야 비로소 내가 얼마나 6모를 잘 봤는지 실감이 났다.     



6모의 '환상적인' 성적표



전년도 수능과 비교했을 때, 심지어 전 해 9모와 비교해 봐도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사상 첫 올 1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수학 가형이라는 게 존재했던 시절이니, 올 1컷은 고연공이라는 공식이 통용되었다. 그렇다면 모든 과목에서 1컷을 상회하는 성적을 받은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저절로 행복 회로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 행복 회로 때문에 한 일주일을 날려 먹었다. 그동안 작년 수능에 대한 고찰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국어에서 사상 첫 2등급을 받고 좌절했던 것은 과거의 일이 되어갔다. 만일 등록을 포기했던 대학을 다시 가게 된다면 이번엔 치의예과를 가게 될 거로 생각했다. 그나마 양심은 있었는지 의대 생각은 안 했다.

이때부터 9모를 치기 전까지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러던 8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기승을 부리는 폭염에 내가 슬슬 풀어져 가는 게 느껴졌다. 더워서 공부하기 힘들 때라는 것을 학원에서도 아는지, 쌤들도 이전만큼 학생을 엄격하게 단속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나는 수학 문제를 들고 오랜만에 문풀쌤을 찾아갔다.     

문제 자체에 대한 얘기는 금방 끝났다.


“요즘 공부가 되게 안 되네요.”

무심결에 튀어나온 소리였다.

“학생 6모 되게 잘 쳤잖아요.”

문풀쌤이 의아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그게 제 실력인진 모르겠어요. 요즘 수학 N제 풀면 거의 반은 별표치고 넘어가는데.”

무슨 N제냐고 묻길래 내가 손을 댔던 문제집들의 이름을 댔다.

“그야 어려운 걸 푸니까 그쵸.”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한 말이었다. 6모에서 처음 30번을 맞춘 뒤로, 나는 킬러 문제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30번급 문제 중에서는 내가 못 푸는 것이 더 많았다. 이는 객관적인 팩트였다.   


“저 그냥 작년 합격했던 대학 가야 했나 봐요.”

여태까지의 자신감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발언을 내뱉고 말았다.

“붙었었는데 등록 안 하고 여기 왔거든요.”

“그럼 원래 목표가 어디였는데요?”     


참 오랜만에 듣는 단어가 등장했다. 

목표. 

지금까지는 막연히 성적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추상적인 목표는 달성할 수 없는 법이었다. 나의 한계는 불명확한 기준이기 때문이었다. 대신 직관적인 목표가 필요했다.


“수의대요.”     

수의사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의치한약수라 불리는 이과 전문직에 들고 싶었을 뿐이었다. 약대야 그땐 PEET 체제였으니 빼고, 가장 만만한 게 수의대지 않은가.     

“지금 학생 정도면 수의대 갈걸요?”

“이걸 못 풀면 못 가지 않을까요?”

내가 가리킨 것은 아까 질문했던 문항이었다.

“그게 30번이라 치면, 30번 하나 틀린다고 큰일 나는 건 아니죠.”

“30번만 틀리면 그런데, 다른 것까지 틀리니까 또 수학 3등급 맞을 거 같아요.”


어쩌면 당시 나는 스스로 내 자존감을 갉아먹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추측의 표현을 썼지만 거의 확신에 가깝다. 내 태도가 자신감 과잉에서 자신감 부족으로 바뀐 것이 이 시점부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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