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로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바로 타로점이 된다.
타로가 점술이라는 걸, 따라서 타로점이라고 불리는 게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걸, 맨 처음 타로 전화 상담을 받으며 나는 바로 알아차렸다. (나이가 들며 기억력이나 빠릿빠릿함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세상 이치에 대한 눈치는 빠삭해진 게 분명하다.)
그 도구가 쌀알인지 주사위인지 막대기인지 다를 뿐, 어차피 같은 메커니즘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담자가 어떤 질문을 하면 상담사는 타로를 뽑아서 그 질문에 대해 답변한다. 그 답변은 뽑은 카드에 나오는 각종 상징이나 숫자들을 종합해 상황에 맞게 해석한 것으로, 흔히 리딩으로 불린다. 이런 행위를 통해 며칠째 잠수 탄 그놈의 속마음을 짐작하기도 하고, 일주일 뒤에 있을 알바 면접의 합격 여부를 예측해 보기도 한다.
이 행위가 쌀알을 흩뿌리거나 막대기를 던지는 것과 다른 점이 있을까? 없다. 그러니 타로가 점술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왜 타로는 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까?
060 사이트에 올라온 어떤 칼럼 제목이 ‘타로는 점이 아닙니다’인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던 적이 있다. 그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타로는 뭘 맞추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고 그걸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는 게 주목적이기 때문에 점이 아니라는 논지였다.
-그 글을 읽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타로의 주목적이 사람들과의 소통인 거랑, 타로가 점이 아닌 거랑, 무슨 상관이지?
또 어느 타로 카페에서 이 문제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진 적 있는데, 의외로 타로는 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놀랐다. 다른 곳도 아니고 프로 상담사들이 많이 포진해 있는 커뮤니티라 놀라움이 더 컸던 듯싶다.
타로가 점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한 회원은, “미술 치료 과정에서도 내담자가 그린 그림을 보며 그 사람의 심리를 해석하지 않느냐, 타로가 점이라면 그런 미술 치료도 점으로 봐야 하는 거냐.”라고 자신의 논지를 펴나갔다.
그러자 다른 회원이 답변했다. 내담자가 카드를 뽑을 때 앞면 그림을 보며 뽑는지 그냥 뒷면을 보며 뽑는지에 따라 다를 것 같다고, 뒷면을 보며 뽑는다면 점술이라고 생각한다고.
그 말을 들으며 정말 정곡을 찌르는 답변이라고 속으로 감탄했었다.
프롤로그 첫 부분에 나온 그 장면, 로드샵에 들어서서 “한 질문에 오천 원이라는 거죠?”라는 질문을 던질 때만 해도 나는 이런 문제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내 목적은 오로지 생생한 타로 현장 스케치였으므로.
타로 샵의 보랏빛 테이블보며 벽에 걸린 깃털 장식품, 신비스러움이 느껴져야 마땅한 주인장의 눈빛 등 타로 외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주인장과 적당히 대화 나누면서 내게 필요한 부분들만 머릿속에 잘 저장해서 나오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타로 상담사에게 첫 전화 상담을 받으며 ‘이건 점보는 거랑 똑같잖아.’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이번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까요?”라고 타로 리더에게 물었는데, 같은 질문을 점쟁이에게 던진 거나 다를 게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기독교인인 내가 타로를 봐도 되는 걸까?
지금은 교회 나가는 걸 쉬고 있지만, 명색이 세례교인인 나는 그동안 되도록 점 보는 걸 피해 왔다. 친구를 따라 두어 번 그런 곳을 간 적 있지만, “사주는 몰라도 점은 절대 안 보겠어!”가 모태 기독교인으로서의 내 최소한의 양심 같은 거였다.
타로가 점이라고 생각하니 타로를 보는 게 영 마음 불편했다. 첫 상담 이후 생긴 호기심이 곧 타로에 대한 관심으로 변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배움에 대한 열정도 커졌는데, 그와 비례해 자라나는 게 바로 죄의식이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점을 보는 행위는 절대적인 금기사항이므로 타로를 보거나 배워서는 안 되는 거란 생각이 나를 파고들었다.
그때 내가 찾은 돌파구가 바로 타로를 공부하되 점술이 아닌 상담으로서 대하자는 거였다. 길흉화복을 점치는데 주안점을 두지 말고 타인과의 소통 도구로 사용하자는 생각 말이다. 그래서 한동안 오컬트적인 요소가 적은 카드를 집중적으로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이 타로의 본질을 바꿔주지는 못한다는 게 문제였다. 어떤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타로를 점술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건 아니라는 거.
두고두고 고민거리로 남을 것 같은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타로'라는 주제는 나중에 별도의 글로 다뤄보고자 한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왜 사람들을 타로가 점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지에 대한 나름의 답변은 이것이다.
타로가 점술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생기는 부정 심리가 아닐까.
그 이유야 서로 다를 것이다. 나처럼 종교로 인해 생기는 죄의식 때문일 수도 있고, 점에 대한 낮은 사회적 인식과 그로 인한 거부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은 후자에 해당할 거라 생각된다.
타로 리더로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점술가나 점쟁이로 불리는 것보다는 상담사로 불리는 게 훨씬 ‘있어’ 보이니까.
이 글을 적고 있는 지금도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