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삼수생의 회고록 6
오랜만에 가는 학원이니만큼 월요일에는 일부러 일찍 등원했다. 나 말고도 미리 도착한 사람이 많았다. 공부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안 끼치도록 조용히 책을 정리했다. 내가 이렇게나 가방을 꽉꽉 채워 들고 왔는데, 정작 집에서 한 페이지라도 본 책은 반도 안 된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그리고 휴원 기간에 수능 원서도 접수하고 왔다. 그때가 3교시 수업을 할 시간이었을 텐데, 나는 안타깝게도 산책 나온 고2 때 영어쌤과 마주치고 말았다. 심지어 그 쌤이 먼저 나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처음에는 무슨 일로 학교에 왔냐고 물어보셨는데, 내가 딱히 답을 안 했는데도 힘내라는 응원의 메시지가 돌아왔다.
씁쓸한 기억뿐이었다. 9모는 여기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객관적으로 아주 나쁜 성적은 아니었는데, 6모에 비하면 너무 초라했다. 모든 게 절망적으로 느껴지며 부정적인 생각만 들었다.
9모가 끝나면 수시 원서 철이 된다. 그해는 9모가 미뤄졌던 만큼 수시 접수도 미뤄졌다. 물론 나는 수시와 연이 없었다. 작년에는 논술이라도 몇 군데 썼지만, 이번에는 아예 원서를 안 냈다. 논술에 나올 법한 어려운 미적분 문제를 내가 풀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수시 상담을 받았다는 둥, 누가 어디를 썼다는 둥의 소문이 들렸지만 나는 그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9월은 그렇게 지났다. 10월이 되자 학원 재학생들은 공부를 더 열심히 하기 시작한 부류와 공부를 더 안 하기 시작한 부류로 양분되었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전자였다. 다만 체력의 한계로 인해 가끔 후자가 되었다. 예전에는 아파도 진통제를 먹어가며 참을 수 있었는데, 이제 조퇴하지 않으면 몸이 회복되지를 않았다. 이에 따라 낭비되는 시간이 늘어갔다.
내가 찾은 답은 일요일 등원이었다. 어차피 코로나 때문에 교회는 대면 예배를 못 하고 있었다. 온라인 예배야 솔직히 집중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이쯤 되면 하나님도 내가 온라인 예배 대신 수학 인강을 듣는다고 해서 뭐라고 안 할 것 같았다. 어차피 교회에서도 나는 이미 ‘재수하러 가서 활동 못 하는 애’로 취급되었으니까.
일요일 등원의 장점 중 하나는 빌런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대체로 빌런들은 한 주의 유일한 휴일인 일요일까지 학원에서 보내려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일요일에 등원하면 쾌적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쌤들의 감독도 느슨했다. 공부하기 힘드니까 잠깐 유튜브 본다고 말만 하면 허락까지 받는 정도였다. 집에 있기도 싫겠다, 나는 매일 학원에 나갔다.
학원에서는 내가 9모를 기대만큼 못 쳐서 막판 스퍼트를 내는 거로 아는 듯했다. 어느 날 원장쌤이 나를 불러 이야기했다.
“요즘 되게 공부 열심히 하던데... 고대 갔다가 반수 한다고 온 여학생 있거든?”
나는 그런 사람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6모 끝난 뒤부터 반수생이 우르르 몰려왔으니, 그중 하나쯤은 고연대에서 서울대, 혹은 서울대에서 의대 가겠다고 반수 하는 사람이 있겠거니 생각될 뿐이었다.
“문과예요?”
“그 친구는 문과지.”
문과는 내 경쟁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문과를 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고, 아예 분야가 다르니 비교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럼 학원에 공부 잘하는 이과생은 누구 있어요?”
“한양대에서 온 학생 있는데, 네가 그 친구는 넘어야지.”
“넘을 수 있을까요.”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니, 왜 못 넘어?”
흔한 격려의 말이었지만, 이미 꼬일 대로 꼬여 있던 나는 이 말조차도 비꼬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드디어 최후의 발악이 터져 나왔다.
“그분은 한양대 다니다 왔으니 저랑은 비교가 안 되죠.”
원장쌤은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며 나를 위로했지만, 심사가 뒤틀린 내게 그렇게 말해봐야 기분이 괜찮아질 리가 없었다. 다음번에 원장쌤을 만났을 때 이 일에 대해서 사과했다. 이 시기면 다른 애들도 예민해져서 그런 식으로 많이 반응하니까 너무 죄책감 느끼지 말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서, 어느덧 나는 노트에 ‘D-14’라고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수능까지 정확히 2주가 남아 있었다. 그렇다. 코시국만 아니었다면, 그날 수능을 치렀을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수능 날짜는 12월 3일로 미뤄지고 말았다. 사상 처음으로 12월에 수능을 치는 세대에 내가 속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남은 14일은 보너스 타임인 셈이었다. 지진 때도 그랬다시피 늘어난 기간에 무엇을 하냐에 따라 탐구 등급 정도는 변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막판 스퍼트를 하면서 탐구 공부량을 늘렸다. 그 대가로 국어 공부량이 줄었다. 작년에 했던 실수를 답습한 것이다. 하지만 성적은 답습하지 않을 줄 알았다. 나는 고3 애들에겐 공포의 대상인 ‘N수생’이었으니까.
수능이 가까워질수록 학원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뭐 각자 사정이 있을 터니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다만 자습실이 썰렁해져서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고, 심지어 체감 온도도 내려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능 치기 전 마지막 주말에도 나는 학원에 나갔다. 엄밀히 말하자면 평일이 며칠 더 남아 있긴 했지만, 정말 수험생 생활을 마무리하는 기분이 들었다. 할 게 없었다. 들을 강의는 다 들어 놓았고, 풀 문제집은 다 풀어놓았다. 결국 평소보다 일찍 하원하기로 결정했다. 로비로 나오자 카운터에 계시던 쌤이 작별 인사를 했다.
“원래 잘했으니까, 잘할 거예요.”
멘트가 왠지 19학년도 수능 특강 표지의 오마주 같았다.
수능 전날은 수험표를 받으러 학교에 갔다. 받자마자 시험장이 어디로 배정됐는지 확인했다. 작년에 갔던 그 학교였다. 다음으로 수험번호의 끝자리를 보았다. 또 짝수였다. 짝수형은 답 번호 배치가 이상하다는 말이 있어서 그런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면 작년과 현재까지의 상황 흐름이 똑같아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