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벌여놓은 일이 많아서 몹시 바쁘고 체력도 바닥이다. 게다가 가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알레르기질환들로 인해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이른 아침에 눈을 떴는데 빨간 김 모락모락 나는 목욕탕 마크가 딱 떠올랐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뒤 세신을 받고 나면 한결 나을 것 같았다. 가고 싶다는 마음과 귀찮다는 마음이 팽팽히 맞서다 결국 욕구가 귀차니즘을 이겼다.
그래서 갔다, 목욕탕에. 그새 목욕비는 천 원이 더 올라 있어서 11,000원을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세신사 세 분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 옆 선반에는 세신 순서를 정하는 열쇠가 네 개나 놓여있었다. 내 열쇠도 그곳에 놓고 돌아와 머리를 감고 몸을 씻었다.
(별로 알뜰하지도 그리 낭비하지도 않는 내가 아까워하지 않는 게 두 가지가 있는데, 그건 세신비와 커피값이다. 이 두 가지가 주는 평화가 너무 커서 도무지 포기가 안 된다.)
각탕을 하면서 내 순서가 되지 않았는지 수시로 확인했다. 세신 침대에 누워있던 사람들이 차례대로 교체되면서 내 열쇠가 가장 앞에 놓이게 됐다. 그즈음 나도 지쳐서 빨리 세신을 받고 목욕탕을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마침내 한 명이 세신을 마치고 일어나는 걸 보며 내 번호가 불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당연히 내 순서일 거로 생각한 빈 침대에 한 할머니가 가서 눕는 게 아닌가. 할머니가 번호를 착각한 거로 생각해 담당 세신사 분이 그 상황을 정리해 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다시 번호를 확인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다가 그쪽으로 갔다.
이번이 제 순서 아닌가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담담하게 물었다. 그러자 그 세신사분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 이 할머니가 더 먼저 왔어요.
나는 그 할머니가 나보다 30분 더 늦게 왔다는 걸 안다. 내가 각탕을 하면서 계속 시계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머니가 나보다 늦게 오신 게 맞다고 다시 말했다.
이 할머니는 며칠 전부터 예약했어요. 이 시간에 해달라고.
나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탕 안에서 다른 할머니들과 나누는 대화를 들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내일 오려고 했는데, 내일은 아들이 출장 때문에 태워다 줄 수가 없어서 오늘 갑자기 온 거라고 했었다.
슬슬 열을 받기 시작했다. 차라리 양해를 구했더라면 양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생각 같아선 세신 안 받는다고 소리치며 나와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목욕탕의 습기와 열기에 지친 나는 다음 순서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철저히 을이 되어있어서 더 화가 났다.
카페에서 이 글 적고 있으려니 그 척척한 분개가 모락모락 되살아난다. 아무래도 조각 케이크 하나 시켜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