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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두 Oct 06. 2024

일요일 아침 동네 목욕탕에서

척척한 분개 9화



요즘 벌여놓은 일이 많아서 몹시 바쁘고 체력도 바닥이다. 게다가 가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알레르기질환들로 인해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이른 아침에 눈을 떴는데 빨간 김 모락모락 나는 목욕탕 마크가 딱 떠올랐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뒤 세신을 받고 나면 한결 나을 것 같았다. 가고 싶다는 마음과 귀찮다는 마음이 팽팽히 맞서다 결국 욕구가 귀차니즘을 이겼다.


그래서 갔다, 목욕탕에. 그새 목욕비는 천 원이 더 올라 있어서 11,000원을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세신사 세 분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 옆 선반에는 세신 순서를 정하는 열쇠가 네 개나 놓여있었다. 내 열쇠도 그곳에 놓고 돌아와 머리를 감고 몸을 씻었다.

(별로 알뜰하지도 그리 낭비하지도 않는 내가 아까워하지 않는 게 두 가지가 있는데, 그건 세신비와 커피값이다. 이 두 가지가 주는 평화가 너무 커서 도무지 포기가 안 된다.)


각탕을 하면서 내 순서가 되지 않았는지 수시로 확인했다. 세신 침대에 누워있던 사람들이 차례대로 교체되면서 내 열쇠가 가장 앞에 놓이게 됐다. 그즈음 나도 지쳐서 빨리 세신을 받고 목욕탕을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마침내 한 명이 세신을 마치고 일어나는 걸 보며 내 번호가 불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당연히 내 순서일 거로 생각한 빈 침대에 한 할머니가 가서 눕는 게 아닌가. 할머니가 번호를 착각한 거로 생각해 담당 세신사 분이 그 상황을 정리해 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다시 번호를 확인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다가 그쪽으로 갔다.


이번이 제 순서 아닌가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담담하게 물었다. 그러자 그 세신사분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 이 할머니가 더 먼저 왔어요.


나는 그 할머니가 나보다 30분 더 늦게 왔다는 걸 안다. 내가 각탕을 하면서 계속 시계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머니가 나보다 늦게 오신 게 맞다고 다시 말했다.


이 할머니는 며칠 전부터 예약했어요. 이 시간에 해달라고.


나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탕 안에서 다른 할머니들과 나누는 대화를 들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내일 오려고 했는데, 내일은 아들이 출장 때문에 태워다 줄 수가 없어서 오늘 갑자기 온 거라고 했었다.


슬슬 열을 받기 시작했다. 차라리 양해를 구했더라면 양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생각 같아선 세신 안 받는다고 소리치며 나와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목욕탕의 습기와 열기에 지친 나는 다음 순서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철저히 을이 되어있어서 더 화가 났다.


카페에서 이 글 적고 있으려니 그 척척한 분개가 모락모락 되살아난다. 아무래도 조각 케이크 하나 시켜 먹어야겠다.



요 목욕탕 마크는 열받는 내 모습을 형상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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