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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두 Oct 14. 2024

내비게이션에 손이 달려 있었다면

내비의 분개 15화


아마 내 뒤통수를 한 대 내리쳤을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깐족대는 5학년 아이처럼 얄미웠을 듯싶다.


오늘 아침 출근을 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내비게이션부터 켰다. 현재 직장으로 발령받은 지 어느덧 4개월 차에 접어들었지만, 아직도 나는 출퇴근이 무섭다. 그런 내게 내비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이다.


내비를 켜니 다른 날과 달리 소요시간이 55분으로 찍혔다. 겨우 지각을 면할 수 있는 상황이라 다른 경로를 뒤져봤다. 그랬더니 그게 가장 일찍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평소 40분 소요되던 경로는 1시간 5분이나 걸리는 거로 표기됐다. 자혜로운 내비님이 알아서 최단 시간이 소요되는 곳으로 안내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됐다. 원래 다니던 경로 안내로 바꿀까 하다, 어차피 내가 가는 길에 맞춰 안내될 걸 알기에 그대로 놔둔 채 시동을 걸었다. 


아무리 막히는 월요일 아침이라도 평소보다 25분이나 더 걸린다는 건 뭔가 문제가 생긴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 보통 사람들 같으면 내비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테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이유 없는 반항 같은 건 절대 아니고, 오로지 두려움 때문이다. 나는 낯선 길을 운전하는 게 정말 정말 무섭다. 더구나 그게 일반 도로도 아니고 고속도로니 더더욱.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라는 안내가 나오는데 나는 평소처럼 좌회전을 했다. 그랬더니 조금 더 가서 우회전하라는 멘트가 또 나왔다. 나는 그 말도 가뿐히 무시하고 직진했다. 


얼마쯤 달린 뒤 다시 우측 도로로 빠지라는 안내가 나왔지만 계속 직진했다. 이번에는 내비가 화가 난 듯 유턴을 하라고 명령했다. 아까 그 우측 도로로 다시 가라는 말 같았다. 하지만 우회전도 하지 않은 내가 유턴까지 해서 그 길로 갈 리 없지 않은가. 계속 직진했더니 내비도 지지 않고 경로 이탈 경고를 반복해 날렸다.


그 후로도 두 번 더 내비의 명령을 거부하며 내 목적지인 IC에 도착했을 때, 평소보다 25분이 더 소요됐다는 걸 알게 됐다.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알게 되자 내비는 조용해졌다. 내비와의 기싸움에서 결국 내가 승리한 것이다!


낯익은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비로소 긴장감이 풀렸다. 어차피 늦었다고 생각하니 마음도 평안해졌다.


그때였다. 내비에게 미안한 감정이 생긴 것은. 

아니, 맘대로 할 거면 도대체 왜 내비를 켜는 거냐고!!! 

항의하는 내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정말 청개구리가 따로 없단 생각이 들었다.


미안합니다. 내비님. 

내비님을 무시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고 낯선 길 운전이 무서워서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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