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나는 ‘어쩌다 의대생 엄마’가 되었다. 삼반수생 딸아이가 한 대학의 의예과에 최종 합격함으로써 얼떨결에 의대생 엄마가 된 것이다.
딸의 합격 소식을 듣고 맨 처음 느껴진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늘 아웃사이더로 떠돌던 딸아이가 기나긴 터널을 지나 이제야 밝은 세상으로 나온 것 같은 느낌,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딸아이 마음속 냉기를 가시게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기나긴 수험생활을 비로소 끝내게 됐다는 후련함 등이 복합된 감정이었다. 아마 의대가 아니라 처음 목표대로 서울대 수의대에 합격했다고 해도 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딸은 12년의 학창 시절을 그야말로 반란군 같은 모습으로 보냈다. 온몸에 가시를 세우고, 그 가시로 인한 상처로 아파하면서 겨우 그 과정을 마쳤다. 거기에 2년의 재수생 시절까지 더해지니 무려 14년 동안 마음을 정박하지 못하고 떠돌았던 셈이다. 물론 의대에 합격했다고 해서 표류가 끝난 것은 아니다. 지금은 또 다른 고민거리를 잔뜩 껴안은 채 다시 나침반을 들고 헤매고 있으니 말이다.
그 이야기는 차차 나누기로 하고, 프롤로그 성격의 이 글에서는 딸이 의대생이 된 과정을 간단히 적어보겠다.
딸아이는 비학군 지역의 한 여고를 졸업했다. 당초 지원했던 1 지망 고등학교에서 밀리는 바람에 가장 원하지 않던 마지막 지망 학교, 그것도 딸 성향상 절대 피해야만 하는 여자고등학교로 배정되는 불상사를 겪게 된 것이다. 차라리 딸이 원하던 대로 특목고를 지원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마구 밀려들었다. (나는 두 가지 이유로 특목고를 반대했다. 그 준비 과정에서 겪을 스트레스와 설혹 합격한다 해도 우수한 학생들과의 경쟁을 잘 견뎌낼 수 있을지에 대한 염려가 그것이었다.)
날벼락같은 배정 결과 때문에 딸의 고교 시절은 불평불만이라는 불씨를 안고 시작되었다. 정말이지 ‘손대면 툭 하고 터질 것만 같은’ 시한폭탄이었다.
학교 다니기 싫다는 말을 만 번쯤, 전학 보내달라는 말을 오천 번쯤, 자퇴하고 싶다는 말을 칠천 번쯤 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엄마인 나는 딸아이의 요구를 선뜻 들어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정규 고등학교 과정은 마쳐야 한다는 꼰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고교 졸업장에 대한 집착만은 아니었다. 가뜩이나 사회성이 부족한 아이가 마지막 연습 기간인 고교 시절마저 날려 버리면 나중에 사회인이 되어 더 큰 어려움에 맞닥뜨릴 거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나중에는 자퇴하는 쪽으로 결정하긴 했는데, 막상 자퇴하려니 겁이 났는지 딸은 꾸역꾸역 학교를 다녔고 결국 졸업장을 받았다.
중간에 전학을 알아보기는 했지만, 그것은 다른 지역으로의 이사가 선행되어야 하는지라 역시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면 좀 더 적극적으로 방법을 찾아볼 텐데, 그때는 상황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다. 딸에게 너무나도 미안한 부분이다.
이런 상황이니 객관적인 성실성으로 평가되는 고등학교 내신이 좋을 리 없었다. 학교 적응을 힘들어하면서도 자기 나름의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까지 알아봐 주길 바라는 건 무리였다. 내신 등수와 모의고사 등수차가 무척 컸던 상황 탓에 딸은 자연스럽게 수시를 ‘버리고’ 정시러가 되었다. 이게 삼수까지 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첫 번째 수능 결과는 진짜 ‘폭망’이었다. 서울의 한 대학에 가까스로 합격하긴 했지만, 등록 대신 바로 재수를 택했다. 그때 딸아이가 학원을 강남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했는데, 너무 멀어서 다니기 힘들다는 이유로 그 요구를 묵살해 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는 걸 무척 힘들어하는 딸아이와 아침마다 신경전을 벌이게 될 게 눈에 보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딸은 강남 대신 근처 독재학원(독학재수학원)에 30% 성적장학금을 받고 등록함으로써 재수 생활을 시작했다. 고등학생 시절에 비하면 재수생 시절은 ‘완전 껌’이었다. 어디 매인데 없이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공부만 하면 되니 그럴 수밖에. 학원 내에 빌런이 숨어있다는 둥, 수강생 둘이 연애를 하는 것 같다는 둥, 딸이 들려주는 학원 이야기를 간간이 들어주는 것이 내 역할의 전부였으니 참 편하게 재수생 엄마 노릇을 한 것 같다.
두 번째 수능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받았다. 그동안 학원에서 받은 '환상적인' 모의고사 성적이 일으킨 착시현상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어느 정도 좋은 점수를 얻을 걸 기대했었다. 서울권 수의대 진학이 어려울 거란 생각에 처음엔 망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목표였던 서울권이 아닌 것이 아쉬울 뿐 어느 대학을 졸업하건 같은 수의사 면허증을 받는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딸은 점수에 맞춰 지거국(지역거점국립대학) 수의학과를 지원했고, 예상대로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렇게 수의대를 다니다 다시 반수를 결정하고 수능을 본 게 마침내 ‘대박’이 났다. 그해 국어 시험 만점자가 전국에 총 28명밖에 안 되는 ‘불국어’였는데, 그 어려운 국어 과목을 딱 한 문제만 틀린 것이다. 다른 과목도 골고루 좋은 점수를 받긴 했지만, 그 국어 점수는 아이 학교를 ‘레벨업’ 시켜주었다. 당초 목표였던 곳보다 훨씬 합격선이 높은 대학들을 골라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대학 선택 과정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이야기에서 세세히 적어보겠다.
대략 이런 과정을 거쳐 딸아이는 별로 생각해 본 적 없는 의대생이 되었고, 나는 팔자에도 없는 의대생 엄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