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쓴 '어느 삼수생의 회고록'을 여기 옮기면서 건너뛴 부분이 있습니다. 재수 원서 접수 기간의 이야기도 그중 한 부분입니다. 냉랭한 공기와 팽팽한 긴장감으로 채워졌던 그 마의 시간들.
글이 너무 지루해질 것 같아서라는 게 그 이유인데, 그즈음 이야기를 적어보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딸은 '재수 실패=원서 영역 실패=엄마의 판단 착오로 인한 실패'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제 나름의 억울함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 당시 상황을 딸의 목소리와 제 목소리로 차례로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딸의 목소리
진학사에 모의 지원을 해보았다. 서성한 라인은 볼 필요가 없었다. 가군에 수의대, 나군에 연대, 그리고 다군에 수의대 하나를 더 쓰면 깔끔했다.
처음에는 가군에 수의대 쓰는 걸 엄마가 반대했다. 하지만 설득은 쉬웠다. 서울대는 투과목을 안 골랐으니 제외, 연고대는 나군에 몰려 있으니 제외. 그래서 가군에 쓸 수 있는 학교는 서성한이 최대인데, 그 라인까지 학교를 낮출 바에는 차라리 수의대가 낫다. 대충 이런 논리였다.
이제 남은 유일한 쟁점은 연대를 어느 과로 넣을 것이냐였다. 모든 과를 무난히 들어갈 성적이었으면 입결이 높은 과를 썼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런 과는 노란불이 떴다. 눈을 조금 낮춘, 무난한 인기를 자랑하는 과들이 적정이었다. 공대 중 비인기과나 자연대는 반쯤 프리패스였다. 나는 간단한 분석을 통해 내 입장을 정리했다. 그냥 낮은 과를 써서 연대 합격증을 확보한 다음에 수의대로 가겠다고.
“진짜 수의대 갈 거야?”
엄마의 저 질문은 설의법일 게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수의사라는 직업의 전망이 얼마나 비관적인지에 대한 설명이 쭉 이어졌다.
“지금 A과(높은 과)는 쓰면 떨어지잖아요.”
“연초잖아.”
“진학사는 4칸이에요.”
4칸과 5칸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고 말을 덧붙여야 했지만, 그랬다가는 무조건 A과를 쓰게 할 판이었다. 그래서 4칸이라는 점만 강조했다.
“근데 거기 붙으면 갈 거야?”
대화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가서 변리사 준비해야죠.”
“그니까 갈 데를 써야지. 낮은 데 가면 반수 할 거라며.”
“그냥 연대 붙어도 수의대 간다고 했잖아요.”
“아깐 A과면 간다고 했잖아.”
아무래도 엄마는 내 말의 뜻을 잘못 이해한 듯했다. 이런 오해가 생겼다면 정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냥 쓸 수 있는 과 중에 그나마 A과가 낫다는 거지, 수의대 붙으면 그쪽으로 간다는 거죠.”
“왜?”
답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동물이 귀여우니까 무턱대고 수의대를 선택하려는 게 아니냐며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그러다 왜 내가 그토록 전문직에 집착했는지를 떠올렸다. 답은 거기 있었다.
“연대 가면 그냥 회사원 되는 거예요.”
“아깐 변리사 한다면서.”
“변리사 한 해에 200명 뽑아요. 의치한약수 다 합치면 5천 명 넘는데.”
이 끝없는 논쟁이 이어지는 동안 원서 접수 기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떻게든 결론을 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해질수록 서로의 의견 차이는 더 크게만 느껴졌다.
마침내 마감 당일, 그것도 마감 두 시간 전이 되어서야 나는 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증명사진 파일이 없다는 걸 갑작스럽게 알게 되었다. 사진관까지 가서 파일 재전송을 부탁하고 오는 사이 30분이 또 지나고 말았다.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반인데, 나군을 어디로 지원해야 될지는 아직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일단 가군과 다군부터 원서를 제출한 뒤 엄마를 불렀다. 나는 진학사 모의 지원 화면을 보여줬다.
“그냥 7칸짜리 쓸게요.”
“거기 가면 반수 할 거라면서?”
결국 엄마의 본심은 그것이었다. 재수까지 했으면 입시 판에서 발 좀 떼고 학교나 열심히 다니라는 것. 더 이상 반론을 펼쳐봐야 엄마가 생각을 바꿀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 원서는 연대 A과로 넣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