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딸에게 처음(아마도?) 쓰는 편지가 이런 내용이라 심히 유감이야. 다른 엄마들이 딸에게 쓴 편지를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예쁜 말들로 채워져 있던데, 이 엄마는 공개 게시판에 이런 저격 글이나 올리고 있다니... 하지만 너도 2년 전 입시 카페에 올린 글에서 엄마 흉 많이 봤으니 서로 퉁치기로 하자.
지금부터 네가 쓴 글에 대해 조목조목 따져보려고 해.
우선, 내가 수의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원서 쓰는 걸 반대했다는 주장에 대해.
나는 수의대 자체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진 않아. 수의대가 내 돈을 떼먹은 것도 아니고 뒤에서 내 욕을 하고 다닌 것도 아닌데, 왜 괜히 수의대를 미워하겠니.
(아, 굳이 찾으려면 한 가지는 있다. 오래전에 서울대 수의대 모 교수가 큰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당시 보유했던 주식이 3일 연속 점하한가를 기록해서 열받은 적 있거든.)
내가 수의대 진학을 반대한 이유는, 수의대 전망 자체가 나빠 보여서가 아니라 '수의대생으로서의 너의 전망'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어. 너도 인정하다시피 너는 덜 진화된 사회적 동물이잖니. 수의대 졸업 후 진로가 그리 다양하지 않아 대부분 개인 동물병원을 차린다고 하던데, 그건 전문직이긴 하지만 자영업이잖아. 단지 동물을 잘 치료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물병원을 경영해야 하는 그 일이 너와는 잘 안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수의사라는 직업은 적성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강아지 한 마리 키워보지 않은 네가 단지 전문직이라는 이유만으로 덜컥 수의대를 택하는 건 너무 무모해 보였어. 수의대 진학하고 나서 너무 적성에 안 맞는 걸 알게 되면 그땐 어쩌려고? 여느 학과처럼 그럭저럭 적응하며 다닐 수 있는 곳은 아니잖니.
다음, 엄마 욕심으로 입결 높은 학과를 쓰도록 등 떠밀었다는 주장에 대해
넌 적정인 B학과를 써서 합격증을 확보하고자 했는데 엄마 고집으로 입결 높은 A학과를 쓰는 바람에 불합격했고, 그로 인해 결국 재수에 실패했다고 말하지. 그래, 일정 부분은 인정한다.
당시 넌 B학과에 합격한다고 해도 안 다닐 거라는 말을 했어. 그저 심리적 안정을 위해 합격증을 받고 싶었던 거지. 하지만 가군에 쓴 수의대도 거의 합격 가능한 상황인데 굳이 다니지도 않을 B학과를 써서 귀한 원서를 날릴 필요는 없잖아.
그럴 바에는, 좀 불안해도 나군에는 네가 더 선호하는 A학과를 쓰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라 여겨졌어. A학과에 합격하면 그 이후에 그 둘을 놓고 천천히 결정해도 되는 거니까.
게다가 너는 원서 쓰던 날까지도 확실하게 네 의사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어. 이것보다는 저게 나은 것 같고, 저것보다는 그게 나은 것 같고, 그것보다는 이게 나은 것 같은... 마치 가위바위보 게임처럼 갈팡질팡하는 모습으로 비쳤거든. 그래서 양육자로서의 카드를 쓴 거야.
이런 말 하는 것 치사하긴 하지만, 넌 어릴 적부터 선택을 아주 어려워하는 아이였잖아. 아주 사소한 것조차 선택하는 걸 힘들어해서 네 상담 선생님과 그것에 대해 이야기 나눈 적도 있거든. 선택 범위를 좁혀주는 게 좋다는 게 그 선생님의 조언이었어.
지금까지는 해명이었고 이제 반격한다.
원서 접수 마지막 날, 마감 두 시간을 앞두고 증명사진 파일이 없다고 했던 것을 너는 별일 아니라는 듯 썼더구나. 마치 볼펜을 바닥에 떨어뜨렸으니 주우면 된다는 정도의 일처럼 말이야.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단 한 줄로 적었지.
이제 와 말하지만, 그때 엄마가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없었는지 아니? 전에 사진 찍었던 사진관으로 파일 받으러 간다며 나가는 네 뒷모습을 보면서 이 엄마의 머릿속에는 '환장'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어. '환장하겠네'의 그 '환장' 말이다.
국어사전에서 '환장'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적혀 있거든. 나는 거기에 낱말풀이를 한 줄 추가하고 싶다.
환장 換腸
1. 마음이나 행동 따위가 정상적인 상태를 벗어나 제정신이 아닌 듯한 상태로 됨
2. 무엇에 빠져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몰입함
3. 정시 원서 접수 마지막 날, 마감 두 시간 앞두고 사진 파일이 없다고 하는 상황 혹은 그런 상황을 만든 장본인
아니, 원서 접수 마감 두 시간 앞두고 사진 파일이 없다는 게 말이 되니? 만일 그 사진관에서 파일 보관하지 않고 있으면 어쩌려고? 혹시 그 사진관에 사람 많아서 처리가 지연되는 불상사라도 발생한다면?
그 두 시간 안에 사진 파일 준비 못하면 원서도 못 내는 거잖아.
지금 생각해도 정말 아찔한데 당시 그걸 아무 내색하지 않고 참아낸 내 인내심에 경의를 표한다.
암튼 지난 일은 그만 잊고 미래에 집중하기로 하자. 과거는 신조차도 바꿀 수 없다고 누가 그랬다는데, 한낱 인간이 뭘 어쩌겠니.
그리고 엄마가 살아보니 세상에는 쓸데없는 경험이란 없더라고. 그 시절의 노력과 인내가 널 더 단단하게 만들어줬을 거야. 이런 구태의연한 말 별로인데. 그래도 교훈 같은 말 한마디 넣으면 글이 좀 무게 있게 느껴질 것 같아서 써봤어. 징징대고 투덜거리면서도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널 보며 앞으로 어지간한 어려움은 잘 견뎌내겠구나, 생각했다는 말도 덧붙인다.
할 말 많지만 여기까지만 할게. 너도 알다시피 엄마가 요즘 너무 바빠서 에너지를 아껴야 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