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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토기 화분, 제가 가져가지 않았어요!

by 완두



한 십 년 전쯤에 있었던 일이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던 주말이었다.


외출하려고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는데 화단 앞에 화분 두 개가 놓여있었다.

검은 플라스틱 화분에는 이름을 잘 모르는 화초가 심겨있었고, 토기로 된 다른 화분은 빈 상태였다.

처음에는 '비 맞게 하려고 화분을 내놓은 건가?' 했다가, '저 토기 화분에 분갈이하려나 보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몇 초 동안 그 화분에 눈길을 줬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외출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데 아까 그 화분이 그때까지 비를 맞고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꽃망울이 맺혀있었다.

꽃 피우느라 힘들지?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며 몇 분 동안 그 화분을 바라봤던 것 같다.


다음 날 퇴근하는데 얼굴만 아는 초로의 아주머니가 내게 다가왔다.


혹시 어제 여기에 놔둔 화분 못 봤어요?


아, 그 꽃망울 맺힌 화분요? 봤어요.


그것 말고 그 옆에 있던 토기 화분요.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아니요. 어제 여기서 본 게 다예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집으로 들어갔다.


두 시간쯤 지나서 초인종이 울려 나가 보니 그 아주머니였다.

너무나도 뜻밖의 방문자라 놀란 눈으로 웬일이냐고 물었다.


어제 화단 앞에 놔둔 토기 화분 말인데요.

혹시 그것 어딨는지 아시나 해서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어제 화단에서 잠깐 봤을 뿐이에요.

그런데 왜 그러세요?


분갈이하려고 내놨는데 감쪽같이 없어져서요.

버리는 건 줄 알고 누가 집어 갔나 봐요.


그제야 상황이 파악됐다.

그 아주머니가 분갈이하려고 내놓은 토기 화분을 누군가 가져갔는데, 내가 그 범인으로 의심받고 있다는 걸 말이다.

어이가 없었지만 웃으며 다시 말했다.

어제 외출하다 화단에 놓인 화분을 잠깐 봤을 뿐이라고.


아주머니는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떠났다.

내 마음 역시 석연치 않은 상태가 되었다.



다음 날 밤에 인터폰이 울려서 받아보니 경비실이었다.


혹시 엊그제 화단 옆에 놔둔 화분 못 보셨어요?


아주머니의 질문이 경비 아저씨 목소리로 바뀌어 내게 던져진 거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화분 안 가져왔다구요!

별로 예쁘지도 않던데 그걸 누가 탐낸다고...






얼마 뒤 나는 이사를 했으므로 그 이후로 그 아주머니를 본 적 없고 얼굴도 잘 기억나질 않는다.

하지만 그 아주머니에게 나는 '화분 훔쳐 간 여자'로 남아있을 게 분명하다.

좀 더 적극적으로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증명할 걸 그랬나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쓰다 보니 억울함보다는 궁금증이 더 크다.

도대체 왜 내가 화분 범인으로 지목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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