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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박이 우물에 빠진 날

by 완두



초등학교 3학년, 혹은 4학년 때쯤으로 기억난다.

당시 나는 면 소재지에 살고 있었는데, 우리 집은 읍내 중심가에 있었다.

병원이랑 목욕탕도 있고, 오일장도 서고, 늘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나름 그 지역의 '핫플레이스'.


학년이 바뀌어 명희라는 아이가 내 짝꿍이 되었다.

나는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한지라 반 친구들보다 한 살 어렸는데, 아홉 살에 들어온 명희는 반 아이들보다 한 살이 더 많았다.

따라서 우리는 두 살이나 차이 났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금세 친해졌다.

아마도 명희가 참 배려심 많고 따뜻한 아이여서 그 관계가 잘 유지됐을 거다.


어느 날 명희가 자기 집에 놀러 가자고 했다.

도로를 두 개나 건너고, 큰 다리도 지나고, 작은 징검다리까지 건너서, 걷고 또 걷고서야 명희네 집이 나왔다.

우리 걸음으로 한 삼십 분 정도 걸리지 않았을까 싶다.





명희네 집 근처에 커다란 우물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거기서 물을 길어다 먹는다고 했다.

당시 우리 집에서작두펌프를 사용했던지라 우물이라는 걸 본 건 처음이었다.

신기해하는 날 위해 명희는 두레박을 우물 안에 던져 물을 길어 올리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명희가 길어 올린 두레박 속의 물은 달고 시원했다.


그 뒤로 몇 번 더 명희네 집에 놀러 갔는데, 그때마다 우물가에는 아주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뭔가를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우물가를 지나는데 웬일로 그곳이 텅 비어 있었다.

우물 옆에 얌전히 놓여있는 두레박이 눈에 들어왔고, 순간 물을 길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일단 저지르고 보는 아이인지라 바로 우물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재빠르게 두레박을 우물 안으로 던졌다.


그리고...

두레박이 우물 속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줄을 잡고 두레박을 던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놀라서 우물 안을 들여다 보니, 둥근 것 두 개가 나란히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고삐 풀린 두레박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내 얼굴이었다

그 길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달려 돌아왔다.

이른바 뺑소니를 친 거다.


그 뒤로 나는 몇 달 동안 명희네 집에 놀러 가지 못했다.

누군가 내 뒷덜미를 낚아채고 "우물에 두레박 빠트리고 도망친 게 너지?" 할 것 같아서였다.

왜 요즘은 자기 집에 놀러 안 오냐고 명희가 물었을 때도 차마 그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다른 핑계를 댔다.


그렇게 6개월 정도가 지났을 즈음, 같이 하교하던 명희가 자기 집에 놀러 가자고 했다.

아버지가 서울 다녀오시면서 뭘 사 왔는데 그걸 보여준다고 했다.

이미 반년이나 지났으니 괜찮을 거로 생각한 건 내 착각이었다.

명희네 집이 가까워질수록 숨이 가빠지며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두려움을 억누르고 겨우 말했다.

"명희야, 우리 저쪽으로 돌아서 가자."

그러곤 그 우물가를 지나지 않는 길로 돌고 돌아서 명희네 집에 갔다가, 다시 다른 길로 돌아 돌아서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야 고백합니다.

그날 우물에 두레박 빠트리고 도망친 게 바로 저랍니다.

혹시 그날 물을 긷지 못해 저녁밥을 짓지 못한 분이 계신다면 뒤늦게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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