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희 덕
우리 집에 놀러 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 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 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 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나이 들었다는 걸 실감할 때가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맞닥뜨릴 때다.
남의 일 같기만 하던 죽음이 어느새 내 주위에 머물며 주변 사람들을 한 명씩 지워나갈 때, 이제는 죽음도 내 삶의 테두리 안에 넣을 때가 됐다고 생각하게 된다.
헤어짐을 준비할 수 있는 죽음은 그나마 나은데, 갑작스러운 부고는 늘 힘들다.
며칠 전 출장을 가기 위해 주차장으로 가는데, 점심 식사를 마치고 들어오던 직원분이 말을 걸어왔다.
"날이 더우니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나는 꽃무늬 양산을 흔드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차에 올랐다.
그리고 정확히 한 시간 뒤 그분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계단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병원으로 실려가는 도중 돌아가셨다고 했다.
사인은 심장마비.
그러고 보니 첫 발령지에서 만난 상사 두 분이 심장마비라는 것으로 유명을 달리하셨다.
현재의 내 나이보다 몇 살 아래였던 한 분은 아침 업무 협의를 마치고 나오다 문 앞에서 쓰러지셨다고 했고, 다른 한 분은 공로연수를 몇 달 앞두고 간 연금공단 연수장에서 60년의 생애를 마쳤다고 했다.
발령받아 간 자리에서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전임자의 흔적, 이름이 붙은 가위, 결재판 등을 보며 마음이 아렸던 적도 있다.
이 글을 몇 시간째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 문득 이 시가 떠올랐는데, 그렇다고 시 한 편만 달랑 올릴 수 없어 주저리주저리 애먼 말만 늘어놓고 있다.
정작 쓰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지만, 아직은 그 이야기를 꺼낼 자신이 없어서다.
정리되지 않은 글이라 그냥 서랍 속으로 넣을까 하다, 시라도 같이 나누고 싶어서 발행을 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