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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Jul 16. 2021

영화 <불한당> 감상평

1. 이 글은 영화 <불한당>에게 보내는 나의 연서이며, 관람 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동봉한다.


2. 영화 <불한당>은 ‘잠입수사’라는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중반에 이르러 조현수(임시완 역)라는 캐릭터는 자의로 정체를 발설한다. 이 지점에서 의문이 든다. 그는 왜 죽음을 불사하고 정체를 알렸고, 그런 조현수를 한재호(설경구 역)는 왜 살렸고, 더 나아가 그를 믿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이다.


3. 이것의 답은 한재호의 개인사를 조현수에게 털어놓는 지점부터 이야기를 해야만 알 수 있다. 한재호가 연기를 하듯이, 조현수에게 자신의 가정사에 대해 말한다. 한재호는 왜 그에게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했을까? 조현수가 고백하기 전부터 이미 그는 조현수의 정체를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유추하자면, 한재호의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그리고 연기를 한 목적은 ‘착한’ 조현수를 얻는 것이다. 두 사람은 거짓말과 진실로 서로의 신뢰를 얻으려고 한다. 서로의 신뢰를 얻어내려는 그때부터 ‘브로맨스’가 시작된다. 그들의 최종 목적은 ‘믿을 수 있는 그를 얻는 것’이나, 두 사람의 근본이 되는 정서는 다르다. 조현수는 유일한 가족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줬던 한재호가 또 다른 가족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섞인 믿음이 바탕이며, 한재호는 자신이 받아본 적 없는 (가족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갖고 있는 조현수라는 인물에 대한 동경이 각기 가진 정서다. 극의 후반 잠입조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마약을 챙겨 조현수를 찾아간 한재호의 심리는 위에 언급된 정서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정체를 밝힌 이후 한재호는 조현수를 “착해서 (자신을) 믿는다”고 했으며, 그 후 본인이 ‘착하게’ 조현수를 믿는다. 이에 반해 조현수는 “상황을 믿는”다는 한재호처럼 결국 경찰과 함께 그를 아지트로 불러낸다. 두 사람은 상대방에게서 원하던 모습을 자신에게 투영시켰다. 두 사람은 동일 인물이 아니기에, 타인에게 바라는 자신의 감정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소망하는 감정은 지속적으로 생성했으나 분출되지 못했다. 그 감정은 결국 자신에게 반영이 되어 결국, 한재호는 또 다른 조현수가, 조현수는 또 다른 한재호가 된 것이다. 또한, 거짓으로 신뢰를 쌓으려했던 한재호에 대한 조현수의 믿음이 무너지면서 ‘브로맨스’는 불행한 결말을 맺게 된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한재호(설경구)가 감옥에 들어가 바로 담배 유통권을 얻기 위해 피를 흘리며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그리고 출소 후 한재호는 회장의 피를 얼굴에 묻히며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것과 유사하게, 조현수는 최선장을 시계로 폭행하며 손과 얼굴에는 붉은 피가 묻는 것을 시작으로, 결말에 이르러 자신의 얼굴과 손에 한재호의 피를 묻힌다. 결국에는 세계에 홀로 남은 유일한 사람이 되며, 힘(권력)을 손에 넣는다. 영화 속 세계는 친절하게도 인물들에게 고유한 색상을 입혀 ‘권력의 변화’를 표현하며 인물의 전도를 나타낸다.


4. 여기서 질문이 또다시 발생한다. 왜 세계는 인물들의 정서를 전도시킬 상황으로 내몰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이 세계 자체가 잠입수사라는 형태의 골격을 갖고 있는 것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세계가 표방하는 잠입수사라는 골격 자체가 일종의 ‘맥거핀’이다. 흔히 언더커버, 형사라는 소재가 나오는 영화는 선과 악의 대립이 등장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선으로 규정되는 경찰조차도 속이는 주체보다 속임을 당하는 타인의 잘못을 질타할 정도로 ‘선과 악’의 대립 구조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극에서 이 골격이 사용된 이유는 인물들의 대립과 장르적인 즐거움을 관객에게 선사하기 위해서다.

심지어 주인공인 조현수 조차도 정의와 불의 사이에서 고민을 하지 않는다. 상황을 믿으라는 한재호의 조언처럼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오로지 자신의 정체성이 아닌 타인의 정체성에 대해서만 서로가 고민할 뿐이다. 이것은 선악의 대립이라는 장르의 특징을 등장인물이 가진 정체성의 대립과 변형이라는 것으로 변주시킨 것이다.

 영화 <불한당>은 세계와 관객의 줄다리기를 시도한다. 인물들의 친밀감을 높여놓고, 그것이 과해져 서로가 전도된 두명의 캐릭터와 관객이 마주한다. 그리고 장르에 충실하게 매진하면서 ‘잠입수사’ 형식을 취했지만 그것의 목적과 결과에 대한 언급 없이 영화가 끝나 버렸다. 세계와 캐릭터들의 이런 변신과 변화는 관객에게 밀고 당기는 것을 반복하는 줄다리기와 같은 흥미를 돋아준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캐릭터와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그것을 소모시켜 관객에게 두 시간의 즐거움을 줬으니 그것만으로도 좋아할 이유가 충분하다.


    그들만의 파워 게임이 진행되고, 그들만이 존재하는 무중력상태를 유지한다. 중반까지는 장르의 오락성을 충실히 실행한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세계는 캐릭터와 자신의 변화를 시작한 것일까? 나는 그 시작점을 조현수가 최선장을 맞잡이 하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이 시퀀스는 영화 ‘올드보이’의 장면을 오마쥬했다. 많이 차용된 장면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비슷한 촬영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이 시퀀스에서의 시각은 큰 영향력이 없다. 시퀀스에서 흘러나오는 사운드(청각)를 이길 것이 아무 것도 때문이다. 최초에 해당 시퀀스는 프레임 속의 시각이 아닌 조현수의 시계에 녹음된 소리를 천팀(전혜진 역)이 듣는 청각의 감각으로 시작되며, 그 후 3분 여 동안 흘러나오는 O.S.T. 에 겹치는 오디오는 주먹다짐하는 소리, 신음소리만을 들려준다. 관객의 시각을 지배하는 청각이 일으키는 효과는 폭력으로 기이한 카타르시스를 동반한 쾌감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객은 3분 동안 인물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정보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재호와 조현수의 결속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남성이 하나의 목적을 이루는 행위만을 집중해서 바라볼 수 있게 청각이 주도권을 잡아 관객에게 집중력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조현수는 녹음이 되는 시계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부셔버리며 자신은 한재호의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공표하며 경찰에게 알리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계는 왜 관객의 집중력을 필요로 했으며, 그 집중력으로 봐야할 대상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시각을 지배하는 청각을 표현하는 이 장면은 넌센스에 불과하다. 관객이 인지해야할 것은 보이는(시각) 장르의 형태가 아니라, 그 후에 오는 인물들의 형동과 결속이라는 정답을 갖고 있는 넌센스 말이다. 이 지점을 기점으로 영화 불한당은 장르와 세계 속 인물들이 변모하는 과정을 보인다.


5.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세계는 장르의 이점을 충실하게 이용함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위치, 정서 등을 원래와 달리 바꿔버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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