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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Jul 12. 2021

영화 <생일> 감상평

다독인다는 것에 대해



- 들어가며


    영화 <생일>은 결핍된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되, 그 결핍과 부재를 보상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필자는 관람을 통해 일종의 다독임을 받았다고 인지하게 됐다.  영화 <생일>은 두 가지의 방식으로 재난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유도한다.


- 무중력의 공간에서 성장하다


    <생일>은 기존의 영화들과는 달리 사건을 통해 구성원의 부재에 대한 슬픔과 그로인해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부재보다는 존재하는 그러니까 남겨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사건과 관련한 것들은 누구나가 처음 겪는 생소함이라는 지점에서부터 남겨진 사람들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맞는 하루하루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자신의 삶으로써도 처음이며, 누군가의 무엇이라 불리며 자신을 구성하는 호칭의 삶도 매일매일이 처음이다. 처음인 하루는 서툼의 또 다른 표현이며, 시간의 누적을 통해 서툼과 생소함은 익숙해져간다. 다만, 영화속 엄마(전도연)와 아빠(설경구)는 수호(윤찬영)의 부재를 겪으면서 타인들이 누리는 롭게 시작되는 하루가 멈춘다. 여기서 시간은 사람이 정신적으로 성숙하는 것과 육체적으로 성숙하는 것으로 구분 지을 수 있다. 그리고 필자가 지칭하는 시간(=하루)는 정신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수호의 엄마(전도연), 아빠(설경구)에게는 정신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시간이 멈춘 것으로 그린다. 그러나 유일하게 해솔이만큼은 육체적, 정신적 시간이 흘러가는 것으로 그린다. 다만 오빠의 부재와 함께 부모에게 받았어야할 사랑도 결핍이 된 채로 성장한다. 그것 또한 예솔이의 삶이며, 그 삶은 결코 동화가 될 수 없다. 죽음으로 인해 발생한 부재에 대한 충족은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예솔이의 삶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부모의 시간이 정지된 공간에서 자라나는 예솔이는 부재를 안고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첫 번째 세대가 되기 때문에 수호와는 다른 의미가 된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가족들은 부재의 공허에서 벗어나 함께 살아가는데 이때 가족들이 성장하고 살아가는 모습에서 관객은 희망을 느낀다.


- 슬픔을 나누는 세레머니  


   영화는 생일잔치라는 일종의 세레머니를 향해 가게끔 만들어졌다. 이 세레머니를 진행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부재를 기억한다는 것과 어찌할 바 몰랐던 슬픔을 표현하는 것에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것의 진짜 이유는 낭송되는 한편의 시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 시를 만든 시인은 아마 우찬(탕준상)이나 예솔이일 것으로 추측된다. 극중에서 연필을 잡으며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은 우찬과 예솔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우찬이는 공부를 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예솔이는 오빠의 서랍장에서 필통을 꺼내 어떤 행동을 한다. 그리고 엄마 순남의 기척이 들리자 빠르게 정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세레머니에서 예솔이만이 유일하게 오빠와의 추억을 이야기하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 시인이 쓴 시를 통해 우리는 센서등이 켜지면 등장인물은 수호가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러나 이 낭송으로 통해  관객은 수남의 여러 행동을 통해 센서등이 갖는 메타포에 대해 ‘재’확인을 하게 된다. 시의 낭송 전까지 센서등을 통해 갖는 감정은 슬픔 뿐이었다. 관객은 그 센서등을 바라보는 순남을 통해 수호의 부재를 계속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낭송된 시로 인해 관객과 순남은 센서등이 켜지는 것은 부재의 신호가 아닌 방문의 신호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해솔의 가족과 관객에게 정립된다. 엔딩시퀀스에서는 인물들이 정신과 육체가 성숙하는 완벽한 시간을 살고 있으나, 아무도 센서등이 켜지는 것을 보지 못한다. 이것을 바라보는 것은 관객뿐이다.  관객은 기계의 결함은 정일이 수리한 것을 보았으니 고장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 장면을 선택한 이유는 세레머니를 통해 슬픔을 같이 공유한 가족들은 사라지지 않는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으나, 이것을 지켜보는 관객은 그 시간을 공유했으나 그 삶을 살아갈 수 없으므로 홀로 센서등이 켜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으로 마음의 위로를 받기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 그리고 그렇게


영화를 관람하며, 영화라는 매체를 소비한 것은 맞다. 그러나 소비를 통해 발화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재난의 당사자들과 그 외의 타인들에게 슬픔, 결핍과 부재의 부채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줬고, 그것과 함께 삶을 살아가야한다는 삶의 지속성에 대한 이야기를 남겼다. 그리고 이 영화는 세월호라는 재난을 되돌아보는 첫 계기, 발걸음이라는 가치를 갖게 됐다. 그리고 큰 장점은 영화 <생일>은 암전되며 종료됐으나, 관객의 마음에는 센서등이 켜지며  영화로부터 다독임을 받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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