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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Jul 09. 2021

영화 <플레이타임> 감상평

윌로씨가 필요한 이유

   영화 ‘플레이타임’을 봤다. 이 영화는 1부와 2부로 구성되며, 모든 이야기속에 네모와 직선의 형태가 프레임 안에서 펼쳐진다. 이 형태가 주된 시각을 이룬다면, 1부와 2부의 이야기를 구별 짓는 결정적인 요소는 청각 요소인 ‘사운드’다.  1부에서는 백색소음으로 대변되는 기계음과 멀리서 걸어오는 인물의 구두소리를 지속적으로 들려주는데, 딱딱한 효과음, 전화, 방송 등이 일방적으로 나오는 소리 혹은 대사들이 사용되어 건조한 분위기의 세계를 그린다. 이에 반해 2부는 새로 오픈한 레스토랑에서 벌어진 일을 다루는데, 이때의 사운드는 음악소리, 사람들의 주고받는 대화 소리 등으로 가득 채워지며, 활기가 넘치고 생명력 넘치는 세계로 그려진다. 이 사운드의 사용방식은 결국 ‘소통’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예를 들어 1부에서는 윌로씨와 회계과의 라크씨가 소통이 되지 않아 만나지 못하거나, 사장과 점원과의 소통이 되지 않아 그들에게 윌로씨는 서류를 훔친 범인이 된다. 심지어 점원은 박람회에 온 사람들에게 “문을 ‘쾅’닫아도 황금 같은 고요함”이라고 자신이 판매하는 문을 홍보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세계 속 사람이 아닌 세계 밖 관객에게 외치는 것 같았으며, 이 장면을 보면 자본주의의 문제점의 해결방식 혹은 현대사회를 이해하는 감독의 생각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심지어 ‘플레이타임’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인 네모난 창을 가진 집으로 친구의 초대를 받은 윌로씨의 장면을 보면 카메라의 시선조차 소통을 거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캐릭터들이 건물 안에 있음에도, 심지어 그들이 대화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는 외부 공간에서 그들의 대화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때의 사운드는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와 길가는 사람의 휴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결국 우리는 그들이 대화하는 내용을 알 수 없다.  

    이에 반해 2부는 개업한 당일 레스토랑의 저녁을 다룬다. 이 장소에서는 지속적으로 문제가 발생하지만, 이야기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계속적인 대화를 한다. 계속 웃는 점원을 바라본 후 부엌에 있는 술의 양을 체크하는 사장과 의자 등받이의 왕관 모양이 그대로 사람들 등에 새겨지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말을 한다. 그 와중에 레스토랑에서는 타인의 문제해결과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의 상반되는 모습에 점차적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갖추기는 하나, 점원 한명이 하나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해결한다. 왕관의자에 걸려 처음 바지가 찢겼는데, 이후 같은 문제를 경험하는 동료에게 옷을 바꿔주며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것이다. 대부분의 문제들은 윌로씨가 들어가며 해결이 된 1부의 이야기와 비교해보면,(물론 윌로씨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2부의 문제는 윌로씨가 아닌 다른 인물들이 해결을 해나가며, 그 방식은 인물들의 대화를 기초로 한 (옷의) 교환 혹은 소통을 통해서 이뤄진다는 것이 가장 다른 점이다. 이때 사운드는 흑인 연주자의 음악으로 경쾌하게 바뀌며 활기를 찾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왜 이렇게 말없는 윌로씨를 주인공으로 설정해서 굳이 두 개의이야기로 나눠서 영화를 진행시키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야한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통유리로 된 창문’과 ‘윌로씨’라는 인물에 대해 생각해야한다.  1부와 2부의 이야기 속에서 중심적으로 등장하는 소재인 ‘통유리’라는 소재는 모순적이다. 앞서 카메라의 시선과 같은 맥락으로써, ‘통유리’는 소통을 방해하는 소재다. 내부는 다 보여줘도, 안의 인물들의 대화를 통한 감정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1부에서는 박람회장의 유리문을 닫는 행위와 유리문이 닫히는 행위가 등장한다. 하지만, 2부에서는 레스토랑에서 연주가 시작될 때 창문이 갑자기 열리며 경쾌한 음악이 식당 밖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이와 동시에 윌로씨의 친구인 도어맨은 윌로씨가 깨뜨려 버린 유리문이 마치 아직도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하며 손잡이만을 갖고 손님을 받는다. 그러나 이후 손님으로써 거부해야하는 사람들조차 (어쨌든)열려져 있는 문을 통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통유리’, ‘사운드’, ‘카메라의 시선’, 두인물이 사용하는 소통되지 않는 다른 언어 등이 영화 ‘플레이 타임’안에서는 즐비하게 등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흥미로운 지점 하나는, 앞서 말한 1부와 2부를 연결 짓는 지점이 바로 윌로씨와 코를 다친 회계사와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시작이 됐다는 것이다. 이들의 우연한 만남이 도어맨과 윌로씨를 만나게 했고 2부가 시작된다. 이것을 토대로 볼 때 극을 이뤄가는 스토리는 ‘사람들의 만남’ (윌로씨와 회계사, 윌로씨와 바바라, 바바라와 꽃집 사장 등)으로 이뤄지는 양상인데, 정작 화면상에서 보여주고 들리는 것들은 만남과 소통을 차단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스토리(만남, 혹은 사운드)와 프레임 간의 격차에서 발생되는 모순은 세계의 프레임 속에 등장하는 사각으로 통일된 건물(모양)의 획일성을 한 번 더 만나면서 기묘한 느낌을 발생시킨다. 이것은 감독이 느끼는,(영화 속) 세계가 표상하려는 현대 사회에 대한 태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영화 속에서 윌로씨의 중요도는 현저히 낮다. 그가 없어도 영화의 세계는 잘 돌아간다. 그는 주인공인데도 말이다. 윌로씨는 극속에서 ‘스페어 부품’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진행되는 상영시간에서 유일하게 윌로씨만이 호의를 가진 타인의 초대를 받고, 선의로 선물을 하며 타인을 기쁘게 한다. 그는 정밀한 기계와 같은 현대사회에 꼭 들어맞는 인물은 아닐지라도 고장이 났거나, 혹은 날것 같은 상황속에서 혹은 어딘가에서, 언젠가는,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인물이다. 아마도 감독이 바라보는 소통의 부재와 모순으로 가득 찬 현대사회에서는 윌로씨의 선의 혹은 그의 존재가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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