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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Jul 08. 2021

영화 <포스마쥬어: 화이트베케이션>감상평


01.

   “사실 우릴 덮친 건 눈사태가 아니라, 눈사태에서 생긴 눈 먼지 이었던 걸 알았어. 진짜 눈사태는 식당에 다다르기 전에 끝났고, ~ 갑자기 파란 하늘이 나타나고 다들 망할 놈의 눈사태는 애초에 없었단 걸 알았지”


에바의 이 대사가 영화 <포스마쥬어:화이트 베케이션>을 관통한다.


영화는 작은 균열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균열이 봉합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감독은 ‘영웅, 가족’이라는 인식에 대한 조롱을 사건으로 만들어 인물들에게 겪게 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인물이 가진 의식”에 대해 조롱한다. 감독은 <더 스퀘어>에서도 <포스마쥬어>에서도 그런 형식을 유지한다. 감독의 이런 행태는 자신에 대한 반성인지, 시대모습을 그대로 투과시키는 여과지와도 같은 역할인지 불분명하게 그린다. 한 가족을 일련의 사건으로 몰아넣고 중간 중간 불편하고 불안하게 관객을 몰아넣는 그것은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왜’라는 질문과 ‘어떻게’받아들여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그냥 ‘가족의 재난’에 대한 이야기라고 섣불리 마무리를 지어볼까한다.


02.

    돋보기를 들이 댄 것과 같이 가족에게 불어 닥친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그게 재치 있으며, 개그감이 난무한다. 이 ‘재미짐’ 뒤에 있는 것을 그냥 나열을 해보기로 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섣불리 마무리 지을 예정이니까.

     영화는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을 계기로 변화하는 과정을 그리고 복구되는 과정을 그린다. 사건이랄 것 없는 이 작은 균열은 아버지(토마스)의 자존심, 어머니(에바)의 믿음과 신뢰가 결부되어 일이 커진다. 토마스는 산사태가 났던 사건에 대해서는 자신의 기억과는 다르다고 에바의 말을 자른다. 이것이 문제만은 아니다. 에바도 토마스와 똑같이 행동하다. 그 숙소에서 만난 여성과 술을 마신 후, 스키를 타러 올라간 산에서 올라가 소변을 보기도 한다. 또한, 사람들 앞에서 남편의 행동에 대해 자신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일방적으로 몰아붙인다. 그 후 휴가가 끝난 후, 버스에서도 본인도 남편과 같은 행동을 하는 가자당착의 모순을 범하게 된다.

   영화는 이렇게 종료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아이들을 버리고 간 아버지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윤리적으로. 하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당위성이라 여기는 자만심을 가진 인식’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감독은 “당신은 아버지니까 아이들을 버리고 도망간 행위는 용납되지 않아” 혹은 “잘못을 왜 잘못했다고 인정하지 않는 거야”라는 에바의 입장과  “나는 잘못한 게 없고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잘못된 거야”로 대변되는 토마스의 입장에 대해 조롱한다. 의뭉스럽고, 은밀하게 말이다.  그 조롱하는 방법이 나름 너무 의뭉스러워서 그것에 웃음이 유발된다. 예를 들어 영화의 시간속 시간은 ‘밤과 낮’보다는 자막으로 등장하는 휴가 첫째 날, 둘째 날……. 이라는 식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4일과 5일차의 시간은 사라진다. 그렇다면 3일차에서 멈춘 시간인 것인가? 불분명하다. 하지만, 부모의 다툼으로 인해 우는 아이들의 모습을 따로 쇼트로 나눠 찍었고, 이 장면의 시점은 부모(주인공)이 아니므로 나는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의문점하나.  왜 시간을 잘 지켜 표시하다가 중간에 사라지게 됐을까. 그리고 답답함을 풀기위해 소리를 질러보라는 친구의 조언에 산을 향해 소리를 치는 토마스를 지켜보면 또 다른 의문점이 든다. 산에서 소리를 치는데 왜 메아리가 들리지 않을까.  그 메아리는 한참 후에 토마스에게 되돌아온다. 바로, 아내와 아이들을 찾아 아무도 보이지 않는 리조트를 배회하던 중 갑자기 나타난 사내들의 쫓김과 그들과 함께 들어간 공간에서 괴성으로 말이다. 감독은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갑갑함은 원래 생기지 말았어야했을 감정이므로 다시 너에게 돌려준다. 감각적이고 잊히지 않게 말이다. 세 번째 의문점은 마지막 버스에 올라탄 사람들이 길을 걷는 장면이다. 패니와 에바의 무시를 받던 남성 두 명이 버스의 사람들을 나름 안전하게 하차시킨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사고가 나지 않았지만, 마지막 버스를 놓치고, 추위와 짐도 없이 알프스 산맥을 걸어 내려가는 중이다. 그런 토마스의 옆에는 아들이 손을 잡고 걷고 있으며, 사람들의 앞에서, 중심에서 그가 걷는다. 하늘은 어둠으로 가득할 예정이지만 토마스는 누군가를 안전하게 지켰다는 생각과 가족의 신뢰가 회복됐다는 자만에 빠진 것을 보여주는 장면인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 가족이 정말 회복됐는지 복기해보면, 그렇지 않다. 아버지가 펑펑 울던 그날 밤. 아이들에게 마지못해 끌려와 같이 가족을 끌어 앉던 엄마의 모습. 그 다음날 스키를 타고 내려온 후 엄마가 보이지 않자, 아빠는 엄마를 구하러 가는데 엄마는 가족에게 잘 돌아와 곧바로 씩씩하게 자신의 짐을 찾으러간다. 심지어 엄마는 버스에서 가족을 두고 내렸다. 아버지 토마스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 가족은 봉합되지 않는다. 다만, 봉합됐다고 믿을 뿐이다. 그것을 감독은 보여준다. 그리고 그 조롱의 정점에는 리조트에서 유일하게 육체노동을 하는 근로자를 설정함으로 완성된다. 토마스/에바, 매츠/패니가 싸움을 할 때마다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대사조차 없고 많이 등장하지 않지만, 두 쌍의 커플이 싸움을 할 때마다 위에서 내려다보거나, 그들의 사이를 가로지르는 행위를 통해서 그들을 바라본다. 심지어 토마스와 에바는 413호 방에서 들릴 정도로 싸우며 울기까지 하지만,  기어이 밖으로 나와서 싸우는데 방의 카드키가 없자 그의 도움을 받는다. 토마스와 에바를 ‘부르주아(중산계급)’이고, 리조트 근무자를 노동자계급으로 산정한다면 어떠한가. 그들은 유희를 즐기기 위해 왔고 자신의 생존을 위한 사건이 일어났고,  사건은 해결되지 않지만, 노동자의 도움을 받는다면 이라고 산정하면 너무 과한 해석일까?


3.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에서 가장 독특한 지점은 감독의 반복에서 찾을 수 있다.

 균열이 일어나고 그것이 번지기 시자할때마다 눈사태를 일으키는 폭발음, 특유의 음악, 눈 날리는 장면 등의 반복이 인상 깊은데, 이건 관객에게 보내는 경고와도 같다. 앞으로 또 일이 일어날 거야 혹은 너희도 그러고 있진 않은가라는 뒤돌아봄의 반성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가족이니까 뭐든지 괜찮지.”라고 말하는 고레에다의 영화와는 다르다. 영화 속 인물들을 봉합을 시켰으나 너무 봉합시켜 인물들을 우습게 그린다. 이 영화에서 제 정상인 사람은 누구인 것일까.


이 영화는 그냥 ‘가족의 재난’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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