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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관세음보살

by 길벗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베란다 바로 앞에 제법 키가 큰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이 소나무들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바람과 공기의 일주문이요,

미세먼지를 걸러주는 사천왕이다.

아침에 일어나 베란다 창문을 열면 바람결에 소나무의 맑고 푸른 기운이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오는 듯하다.


그런데 전봇대처럼 싱겁게 키만 큰 줄 알았는데 가지가 제법 우아하고 멋스럽게 휘었다.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붓글씨의 획을 꺾는 듯한 멋이 느껴져 나도 저 소나무처럼

멋스럽게 나이 들 수는 없을까, 꼬불꼬불 퍼머를 해볼까, 머리 염색도 하고

또 누구처럼 그림이라도 그려볼까...... 밋밋한 내 인생 항로를 잠시 이탈하는

어떤 일탈 같은 것도 꿈꿔보게 한다.


볕 좋은 날 소나무를 마주 보며 일광욕을 즐기곤 하는데 때론 까치나 비둘기가 날아와

가지에 앉아 머물고 있는 모습을 보면 장욱진 화백의 새와 나무 그림이 그려지고

구름이나 달이 들어오면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가 부럽지 않다.

바람 센 날 소나무를 휘감아도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소나무가 악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산중의 낙락장송도 좋고 바위를 뚫고 올라오는 멋진 수형의 암중송(巖中松)도 좋지만,

심미안을 일깨워주고 언제든 벗이 되어주기도 하는 우리 집 앞 소나무보다 더 좋은 소나무가 있을까.

오늘도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니 햇살 머금은 소나무의 푸르름이 그대로 전해오는 듯하다.

아낌없이 주는 우리 집 앞 소나무. 나무 관세음보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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