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몸이 안 좋으면 즉시 병원을 찾아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혹시 큰 병이 아닐까 걱정만 하고 있느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서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까 싶어서다.
여기에는 과거의 경험칙에서 나온 자신감도 한몫한다.
이제껏 결과가 양호했기에 이번에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그냥 단순한 건강염려증일 것이라는.
이것도 옛날 얘기다.
요즘은 몸에 이상을 느끼고 용기를 내어 병원을 찾으면
십중팔구 걱정했던 병이나 아니면 그와 비슷한 급의
다른 병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3년 전 이야기다.
너도나도 백내장 운운하기에 혹시나 하고 안과를 찾았다.
직장 다닐 때처럼 냉난방 빵빵한 건조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컴퓨터 모니터 주시하는 시간도 대폭 줄어들었으니
안구건조증도 사라졌을 거란 바람을 갖고. 결과는 대략 난감.
안구건조증도 여전하고 백내장도 언젠가는 수술해야 한단다.
맑은 두 눈을 기대하고 확인차 안과 갔다가 인공눈물만 잔뜩 받아 들고 왔다.
허리도 목도 퇴행성이란다. 그렇다면 다른 신체 부위도 그럴 텐데...
이제 정말 검사받기가 두려워진다. 아예 모르고 사는 게 편하지 싶다.
'퇴행성'이란 단어의 힘은 무척이나 세다.
원인? 처방? 치료? 등 준비해 간 모든 질문들은
'퇴행성!"이란 의사의 선고 한마디 앞에서
파도에 쓸려가 버리는 모래일 뿐이다.
의사 입장에서는 스트레스 탓하는 것만큼이나 편할지 모르겠지만
환자는 야코가 팍 죽는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음이다.
의사가 퇴행성이라고 부르기 전까지는 자유로운 몸짓이었는데
의사가 퇴행성이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병든 노인네가 된 것이다.
"아버님 연세에~". "나이 들면 당연한~", "인간의 몸도 기계랑 똑같다~",
"이 정도는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라고.
퇴행성 판정에 이어 위로랍시고 덧붙이는 말에 마치 피박 쓴 듯 전의 상실이다.
퇴. 행. 성. 이 세 글자가 그동안 잊고 살았던,
아니 모른 척했던 내 나이를 일깨워준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 스스로 어른이 되어
나의 내면 아이를 다독여주는 수밖에 없다.
나이 들수록 싫은 것도 하나하나 받아들여야 하는 거라고,
이제라도 몸을 아껴야겠다고.
내 몸이 낡아버린 것보다 그로 인해 바뀔 수밖에 없는
생활 방식과 움츠러드는 마음이 더 신경 쓰인다.
이 또한 새로운 환경이니 퇴행성의 치유는 결코 퇴행성이 아닌 것이다
기분도 그렇고 해서 5년간 쥐고 있던 스마트폰이라도 최신형으로 바꾸자 싶었다.
당장 저질렀다. 새로운 작동법을 익히고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며칠을 끙끙댔다. 아, 이제 뇌까지 퇴행성으로 바뀐 것이다.
퇴행성. 마치 우주의 행성처럼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도달 불가능한 먼 세상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제 내 몸은 발끝부터 머리까지,
피부는 물론 몸속까지 온통 퇴행성으로 바뀌었으니
나는 수십 수백의 퇴행성으로 이뤄진 작은 우주가 된 것이다.
나는 운신의 폭이 좁아들 수밖에 없는 내 몸도 맘에 안 들지만
'퇴행성'이란 말이 더 걸린다.
퇴출과 행성의 합성어, 곧 우주에서 퇴출된 행성의 이름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