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교 동기 모임을 스케치해 본다.
동기들이 한두 명씩 식당에 도착할 때마다
얼굴을 잽싸게, 꼼꼼하게 스캔한다.
보아하니 모두가 늙었다.
공부 잘 한 놈도, 출세한 놈도, 껌 좀 씹었던 놈도 죄 쭈글쭈글하다.
나도 꽤나 늙었지만 너도 너도 너도 늙었구나, 안심이 된다.
2, 3년 전만 하더라도 동안 소리를 듣는 친구가
더러 있었는데 이제 예외가 없다.
술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너 나 할 것 없이 '아픈' 몸을 꺼낸다.
적게는 한둘, 많게는 대여섯 가지 이상의 약을 먹는단다.
몸 약한 나는 나만 아픈 게 아니구나 싶어 묘한 열등감이 해소되며
위로와 위안을 받는다. 이래서 동기 모임이 좋다.
수십 명이 참석하는 전체 모임에서는
자리를 옮겨 다니는 재미도 쏠쏠하다.
테이블마다 다양한 사연이 펼쳐진다.
집에서 하릴없는 낮달 처지라며 넋두리를 널어놓는 친구,
손주는 유치원 모친은 노치원 다니는 친구의 일상,
아직도 인맥 학맥보다 소맥을 추구하는 상선약주파는
벌써 2차를 도모하고, 그리고 정치 이야기, 시답잖은 농담......
맨정신이면 꼰대 소리로 들릴 얘기도
술 취하니 말씀이나 법문처럼 들린다.
어린 치기도 무용담이 되고, 안 좋았던 일도 세월에 삭혀져
즐거운 추억으로 바뀌는 마법의 호르몬이 분비되는 4시간이었다.
학창 시절 습관 때문일까, 자연스레 친구들의 등수를 매겨본다.
예전에는 공부 잘하는 놈, 출세한 놈, 술값 잘 내는 놈이 최고였는데
이제는 아픈 데 없는 놈, 아니 덜 아픈 놈이 최고다.
그다음은 자식 혼사 같은 숙제 마친 놈,
손주는 있으나 손주를 돌보지 않는 놈도 상위 권이다.
가장 짧은 시간에 그리운 얼굴들을 가장 많이 볼 수 있고
나만 늙어가는 것도 아니고 나만 아픈 것도 아님을 확인하고
공짜로 위로받을 수 있는 자리가 동기 모임이다.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어 아쉬움만 남는 그 시절,
소중한 인연들과의 소중한 추억이 흐르는
소중한 시간, 즐겁고 행복하지만 아쉽다.
소식도 모르는 정겨운 얼굴들이 떠오른다.
이 봄날 다들 평안한지. 그립고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