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의 그림 중 비슷한 분위기를 지닌 작품이 있다. 널리 알려진 <주상관매도>와 <마상청앵도>다. 또 다른 두 작품이 있다. <월하취생도>와 <포의풍류도>다. 이 둘은 마치 한 세트처럼 보인다.
월하취생도는 '달빛 아래 생황을 불다'라는 뜻. 젊은 선비가 넓은 파초 이파리를 돗자리 삼아 글 쓰고 술 한잔하는 모습을 그렸다. "월당의 생황 소리 용울음보다 처절하네("月堂凄切乘龍吟)"라는 그림 오른쪽의 제시(題詩)는 8세기 당나라 시인의 시 중 일부다.
포의 풍류. '베옷 입은 이의 풍류'라는 뜻. 베옷을 입는다는 것은 벼슬을 하지 않고 산다는 의미다. 이런 선비를 포의 처사라고 했다. "종이로 창을 내고 흙으로 벽을 바른 집에서 살며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고 그 안에서 시나 읊조리며 살려 하네"라는 시가 보인다.
두 작품을 아무리 뜯어봐도 별 내세울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두 작품을 소개하는 미술책은 많다. 당시 선비들이 선호했던 붓 벼루 서책 도자기 호로병 파초 같은 소품에서 어떤 상징을 찾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내용이 대다수다. 내 짐작으론 김홍도의 이름값 덕이 아닐까 싶다. 그림 외에도 대금이나 거문고 연주 실력이 빼어난 김홍도가 자신의 모습을 그렸음직한 자화상적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두 작품에 대한 나의 감상평은 이렇다. 한 마디로 둘 다 '보는' 재미가 없다. 여느 풍속화처럼 숨어 있는 상징과 해학을 찾아보는 재미도 없어 심심하기 짝이 없다. 주인공이 김홍도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의뢰로 김홍도가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작품 다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니까 벼슬이 없는 선비의 일상, 그것도 무료한 여름날 글 쓰다 악기 연주하다 술 한잔하는 그렇고 그런 일상을 그린 것이 아닐까. 주제넘게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평론가를 비롯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작가의 의도니 배경 등을 찾고 의미를 부여하여야만이 직성이 풀리는 듯하다. 그들의 일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면도 있고 또 문학 작품 같은 데서 의미를 찾는 오래전의 공부 방식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그런 습성에 이골이 난 나는 이런 심플한 그림에서조차 꼭 무엇을 찾아내려는 그들의 평이 조금은 식상해 보인다. 작품 해석에는 정답이 없고 감상은 오롯이 보는 사람의 몫이다.
월하취생도에 대해 국문학자인 김여울 작가의 해설을 들어보자.
"이 세상에 '나와 너만으로 충분하다'라는 느낌을 주는 그림이 있다.
그 '너'는 꼭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
악기 연주에 완전히 몰입하는 사람, 책에 흠뻑 빠져 있는 사람,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얼굴은 주변의 온갖 자극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오직 대상과 나, 그 하나의 관계만으로 충만한 시간.
김홍도의 <월화취생> 또한 그런 완전한 충일감을 표현한다.
생황을 손에 쥔 채 이 악기가 너무도 소중한 나머지
주변의 다른 것들은 전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악사의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 차 현실의 어떤 고통도 다 잊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늘 남들이 부탁하는 그림만 그리다가, 아무도 부탁하지 않은 그림,
오직 자기 자신의 자화상 같은 그림을 그릴 때 비로소 혼자가 된 자신과 만났을
김홍도의 외로움을 상상하게 된다.
"월당의 생황 소리 용울음보다 처절하네("月堂凄切乘龍吟)"라는 시가
'노래에 달린 날개'처럼 이 그림을 더욱 강렬한 흥취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 흥취에는 '즐거움'만 담긴 것은 아니다.
이 그림을 통해 나는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끝내 보고 가지 못한
예술가의 구슬픈 울음소리를 함께 듣는다.
~중략~
시문을 짓거나 악기를 연주하며 혼자 있어도 결코 외롭거나 심심하지 않았던
옛 선비들의 완벽한 고독의 세계를 영롱하게 그려내었다.
이것은 단원 김홍도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 정여울, <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심리 수업 365> 중
김홍도를 사랑했고 또 김홍도의 삶과 예술 연구에 매진했던
미술사학자 오주석(1956~2005) 선생의 해설로 <포의풍류도>를 감상해 보자.
'종이 창에 흙벽 바르고 이 몸 다할 때까지 벼슬 없이 시가나 읊조린다'라는
화제가 적혀 있다.
내용이 자전적이어서, 정조대왕의 사후 단원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고 생각되는 작품이다.
반듯한 얼굴, 총명한 눈빛, 당비파를 연주하는 앞자리에 생황이 놓여 있어
음악을 극히 애호했다던 일상이 엿보인다.
서책과 두루마리, 완상용 자기와 청동기, 술 든 호리병과 시를 쓸 파초 잎 등이
화가의 인물 됨됨이를 말해 준다.
구석의 칼은 선비의 정기(正氣)를 상징하는 것이다.
사방관을 썼으나 드러난 맨발이 초탈한 심사를 엿보게 하니,
단번에 쓱쓱 그어댄 소탈한 필선과 꼭 닮았다.
하지만 이 모든 선들은 고도로 훈련된 서예적인 필선이다.
현대 화가들이 넘보지 못하는 단원 예술의 극한이 여기에 있다.
그림은 인격의 표출이다.
-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