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한 잔의 행복

by 길벗


술에 대해서는 지독한 편식, 아니 편주(?)를 했다.

오로지 소주 한 가지만을 고집했다.

나이 들어 소주나 소맥에서

막걸리로 주종을 바꾼 술친구들이 상당수지만

나는 꿋꿋하게 소주만 주장했다.

1차도 소주 2차도 소주. 집에서 마시는 반주도 소주.

치킨에도 맥주 대신 소주였다.


어느 날 와인이 착 감겨들었다.

아내가 와인을 반주로 즐겨 마시는 모습을 몇 번 보다가

그럼 나도 한 잔, 그러다가 천천히 와인에 스며들게 되었다.

세상에 술 한잔 못하던 아내에게 내가 술을 배우다니,

결혼식장 와인도 외면했던 내가

와인을 반주로 즐기다니, 반전이다.

와인 맛도 반전이다.

떨떠름하면서도 시큼한, 그러면서도 감미롭고 오묘한 풍미다.


와인은 무엇보다 격식과 분위기다.

겨우 집밥 먹으면서 곁들이는 와인에

분위기 '씩'이나 따질 게재는 아니지만

나는 와인, 특히 즐겨 찾는 레드 와인을 '노을 주'로 이름 붙였다.

노을이 창을 통해 식탁 위로 쏟아지던 어느 날 저녁 레드 와인을 모셨다.

보랏빛과 주황이 어우러진 노을과 레드 와인의 환상적인 마리아주.

분위기만으로도 그만이었다.

소박한 반주가 두보나 이태백이 마셨던 '흐를 유(流)', '노을 하(霞)'의

'노을 주'로 격상되었다.


근사한 이름을 갖다 붙이니

와인에 깃든 멋과 운치까지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와인의 존재만으로도 식탁에 품격이 더해지는 듯하고

혀끝에 닿는 와인과 음식의 감촉을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먹고 마시는 일이야말로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가장 감각적이고 커다란 즐거움이란 걸 새삼 실감하게 된다.


하루하루 빤한 일상에서 노을빛 와인 한 잔이 주는 행복이란!

'이게 바로 세상 사는 맛이지!', '행복이 뭐 별거 있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소설이나 영화도 반전이 따라야 재미가 있는 법,

내 인생도 와인처럼 부드럽고 감미롭게 반전하길

와인 잔 높이 들어 나 홀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외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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