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정확하게 이 문장은 아니지만 비슷하게나마 되뇌어 본 적이 더러 있다. 몇 번의 학교 졸업식과 군 전역, 그리고 이런저런 작별에서다. 같은 제목의 유심초의 노래 영향도 있지만 수화 김환기(1913~1974)의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친근하게 다가온 까닭이다. 그러나 그림을 이해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정작 그림은 이해 불가였다. 대체 김환기가 그리고자 한 건 무얼까, 제목은 또 무슨 말일까.
그림의 제목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김환기의 친구인 시인 김광섭의 시 <저녁에>서 따온 것이다.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서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는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 생각하며 찍어가는 점.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라고 그의 일기에 쓰고 있다. 화가는 이렇게도 그리움을 표현하는구나, 싶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가로 172cm, 세로 232cm의 이 대작(大作) 앞에 서면 파란 밤하늘만큼이나 감미롭고 아름다운 얼굴들이 떠오를 것 같기도 하다. 다들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살고 있을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아련한 얼굴들을 별자리 찾듯 점점이 떠올려본다. 그림처럼 점들이 사방팔방으로 끝없이 이어져 미지의 세계를 만들어내듯 가슴속에서나마 점들을 이리저리 이어본다. 잊히지 않는 별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아래는 유홍준의 <명작 순례>에서 인용한 글이다.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도 섬마을에서 태어난 김환기는 서울로 올라와 중동학교를 마친 뒤 니혼대학 미술학부에 유학하면서 화가의 길을 걸었다. 처음에 추구한 것은 추상미술이었다. 훗날 그는 대상을 어떻게 그려도 관계없다는 것을 보여준 피카소가 고마웠다고 했다. 김환기가 추구한 예술 세계는 한국적인 서정을 모더니즘 어법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가 마음속으로 포착한 한국적 이미지는 매화와 백자달 항아리였다. 고미술을 보는 안목이 높았던 그는 당시 백자 달 항아리의 아름다움에 깊이 매료되어 많은 달 항아리를 수집하여 아틀리에를 장식했다.
김환기는 50세의 나이에 예술원 회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홍익대 미대 학장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뉴욕으로 건너간다. 뉴욕에서 김환기는 조형적 실험과 고민을 거듭하였다.
1968년 일기에는 이렇게 적었다. "점인가? 선인가? 선보다 점이 개성적인 것 같다." "날으는 점, 점들이 모여 형태를 상징하는 그런 것들을 시도하다." 이때부터 김환기의 점 그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던 대상들을 점으로 환원시켰고, 고향 땅 신안의 섬마을, 뻐꾸기 소리를 생각하며 점을 찍었다.
김환기와 여덟 살 위인 김광섭은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 1970년 어느 날, 김환기는 김광섭이 죽었다는 비보를 뉴욕에서 접한다. 그는 너무나도 큰 실의에 빠져 김광섭의 시 ‘저녁에’를 메모하듯 드로잉 했다. 그리고 점화 한 점을 그려 김광섭에게 헌정하듯,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제목을 붙였다. 밤하늘의 별처럼 검푸른 점들이 빼곡히 가득 찬 작품으로 한국미술대상을 받았다.
반전이 있다. 실제로 김광섭은 1970년에 세상을 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김환기가 접한 소식은 오보였다. 오히려 이 작품이 제작되고 4년이 지난 1974년, 김환기가 뉴욕에서 먼저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61세였다. 김광섭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77년, 오랜 투병 끝에 서울에서 생을 마감했다.
* 그림 출처 : 송미숙 <우리 미술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