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그 여자네 집>

by 길벗


김용택 시인은 믿고 보는 시인이다.

그의 작품은 무조건 다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여자네 집>이다.

내용이 길고 낯익은 소재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다.

유년의 기억 속에서도 빛바래지 않은 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진을 보는 듯

풍경이 투영되고 감정까지 고조된다.

눈으로 읽어도 좋지만

소리 내어 읽는 게 더 좋은 시다.


그 여자네 집

- 김용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들어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빡깜빡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 오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 갔다 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 노란 집

저녁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옹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는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연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 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 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있던 집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 박완서 선생도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에 반했다고 한다.

선생의 찬사다.

"읽고 또 읽었다.

처음에 희미했던 영상이

마치 약물에 담근 인화지처럼 점점 선명해졌다.

숨어 있던 수줍은 아름다움까지 낱낱이 드러나자

나는 마침내 그리움과 슬픔으로

저린 마음을 주저할 수가 없어서

느릿느릿 포도주 한 병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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