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아한 정기 그윽한 쇠락의 계절, 11월 14일 오후 석촌호수를 찾았다. 단풍은 별 기대하지 않았건만 '늦바람'도 꽤나 무서웠다. 벚나무를 비롯한 다른 나무들은 수척한 모습이지만 단풍나무는 불을 뿜어내는 듯한 빠알간 이파리로 고군분투 중이고 색이 바래져야만 눈에 들어오는 메타세쿼이아는 호수의 호위무사인 듯 위풍당당, 가을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듯 여전히 물들어가고 있고 플라타너스는 그 넓은 이파리를 우수수 떨구어내며 계절의 정취를 고조시켜주고 있었다.
운치와 낭만은 의외의 장소에서 만끽했다. 호수를 한 바퀴 돌고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는데 늙수그레한 이들이 진을 치고 있는 야외 헬스장에서 들려오는 대중가요 한 자락. 오래전 최백호와 아이유가 같이 부른 <낭만에 대하여>다.
익숙한 노래지만 계절 특유의 감촉이 더해져서일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수의 조합과 열창은 다시 깊은 공감과 함께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 노래를 부를 당시 아주 어린)'첫사랑 그 소녀' 같은 아이유는 '낭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살 떨리는 목소리로 천연덕스럽게 낭만을 호소하고, 낭만 가객 최백호는 가슴에 응어리진 무언가를 토해놓는 듯 설움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거기에다 옛날식 다방, 도라지 위스키, 색소폰 소리, 새빨간 립스틱, 첫사랑 그 소녀··· 신파조의 노랫말이 감정의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참고 참다가 최백호가 절규하는 마지막 소절에 이르러서는 거의 눈물 쏟아질 지경이다.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노래가 가슴을 치고 감정이 요동을 친다. 때마침 늦은 오후의 역광이 시든 이파리를 눈물 나도록 눈부시게 비춘다.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속으로 햇살처럼 그리움이 쏟아져 들어온다. 가슴속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게 어디 한두 가지랴. 지도상으로는 찾아갈 수 없는 고향 집도 그렇고, 좋았던 시절인지도 모르고 지나간 학창 시절, 기억과 추억의 조각조각들······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 "다시 못 올 것에 대해"라는 가사는 이제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콧날이 시큰해진다. 이 빠진 막걸리 잔 앞에서 청승이라도 떨고 싶어진다.
그저 그렇고 그런 나의 청춘인 줄 알았는데 최백호와 아이유는 나에게도 잊히지 않는 얼굴이, 푸른 봄날이 있었다고 노래한다. 늦바람 난 듯 저녁노을빛에 다시 물든 늦단풍에다 허를 찌르는 두 열창이 어우러진 멋진 가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