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생각이 많은 밤>

by 길벗


생각이 많은 밤

- 김용택


생각이 많은 밤이면

뒤척이고 뒤척이다

그만 깜빡 속은 것 같은 잠이 들었다가도

된서리가 치는지

감잎이 뚝 떨어지는 소리에 그만

들었던 잠이 번쩍 깨지는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생각에 매달리어

그 생각에 매달리기 싫어서

일어나 앉아 머리맡에 새어든

달빛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는

더듬더듬 불을 켜보지만

그 생각들이 달아나기는커녕

새로운 생각들이 더 보태지는 것이다


그런 밤이 가고

풀벌레 우는 새햐얀 아침이 오면

마당 한구석 하얀 서리 속에 산국이 노랗게 피어

향기가 더 짙고

집 앞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 떨어진 잎들은

천근이나 만근이나 된 듯 흰 서리에 속이 젖어

땅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마루에 나와 우두커니 서서

이상없이 어제와 똑같이 흐르는

강물이며 그냥 그대로 다 있는 텃밭에

김장 배추라든가

알몸이 파랗게 거의 다 솟은 무라든가

배추밭 구석진 곳에 심어져

쪽 고르게 자란 쪽파에 내린 흰 서리라든가

하얀 서리밭을 걸어오시는

나이가 드실 대로 다 드신 이웃 집 큰아버님의

허리 굽은 걸음이라든가

앞산 산속 참나무 밑이 헤싱헤싱해 보이는 것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개운해지고

텅 빈 마음 안에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또렷이 보이는 것이다

그랬었구나, 그랬었구나 까닭도 없이

고개가 끄덕여지고

그런 것들이,

그러한 것들이

투명한 유리알 저쪽처럼 손에 잡힐 듯 환하게 보이고

마음에 와 그림같이 잠기는 것이다


- 밤이면 생각이 많아진다. 감성까지 풍부해져 이런저런 아이디어도 떠오른다. 해 뜨면 여기저기 안부 전화도 하고 안 하던 집안일도 하고... 의욕이 넘쳐 이런저런 기특한 생각을 하게 된다. 수많은 생각들 중에는 안 해도 될 걱정거리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다음날 모든 게 확연해진다. 간밤 괜찮은 생각이라 메모까지 해두었는데 아침에 보니 별 영양가 없어 메모지를 찢어버리고 만다. 걱정도 그렇다. 쓸데없는 기우였던 것. 결국 간밤에 했던 무수한 생각은 해 뜨자 무효가 돼버린다. 자신의 생각에 깜박 속은 것이다



시골에서는 삶이 문학이 된다고 시인이 말했다. 지금도 그는 섬진강 변에서 자연이 하는 말을 받아쓰며 글을 쓰고 있다. 날마다 피어나는 꽃, 새로 단장한 까치둥지 등 하루하루 다른 자연이 자연스레 글을 쓰게 하는 것이다. 농사짓는 과정도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워 일상을 담담히 쓰다 보면 어느덧 시가 돼 있다니 참으로 부러운 삶을 살고 있다. 김용택 시인의 서정적이고 향토색 짙은 표현이 사뭇 감동적이라 읽고 또 읽다 보면 내가 그 곳에 살고 있는 것처럼 시골 생활이 투명한 유리알처럼 환하게 보인다.


SE-8df8a340-e8af-45d6-ba59-912790f51f31.jpg?type=w1 2015년 3월 매화 필 무렵의 섬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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