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세한도>/장무상망

by 길벗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세한도歲寒圖>는 누구나 다 아는 명작 중에 명작이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세한도의 미술적 가치를 잘 모른다. 불후의 명작이니 하며 다들 극찬을 아끼지 않기에 요모조모 곰곰 따져보며 걸작의 면모를 찾아내려고 해도 그냥 보통 수준을 그린 나무만 보일 뿐이다. 왼쪽의 잣나무 두 그루와 오른쪽의 소나무 두 그루다,


내가 보기엔 뭔가 어색하다. 문제는 집이다. 나무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집을 가건물처럼 어설프게 그림으로써 되레 시선이 집으로 집중된다. 우리 전통의 기와집도 초가도 아닌 건물의 애매한 정체성과 어릴 적 미술시간에 만든 종이 공예품이 구겨질 것 같은 어정쩡한 모습, 어찌 보면 그리다 만 건물처럼 보인다. 아마 세한도가 추사 김정희가 아닌 무명작가의 그림이라면 오늘날까지 그 명성이 유지될 수 있을까란 의구심을 떨쳐낼 수가 없는 것이 솔직한 내 안목이다.



미술사가를 비롯 전문가들의 평은 희한하게도 열이면 열 죄 베낀 듯 똑같다. 전문 화가가 그린 진경산수화가 아닌 서화가로서 문인화를 그린 추사의 내면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세한도는 추사가 그의 제자인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迪, 1804~65)에게 쓴 편지 앞에 그려 붙인 조그만 그림이다. 추사가 세한도를 그려 선물로 보낸 사연은 함께 적혀 있는 편지글에 곡진하게 드러난다. 추사는 그의 제자 이우선이 아주 어렵사리 구한 몇 권의 책을 제주에 유배 중인 자신에게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며 동시에 이런 귀중한 책들을 당대의 권력가나 재력가에게 주지 않고 자신처럼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몰락한 사람에게 선물한 데 대해 깊은 고마움을 표시한다. 그러면서 사마천이 <백이열전>에서 인용한 공자의 말, "날이 추워진 뒤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를 재인용하고 있다.



세상인심이란 예나 지금이나 각박하기는 마찬가지. 추운 날, 즉 세상이 어려울 때 푸른 송백(松柏) 같은 존재가 드물고 귀하다는 것. 정승 집 개 죽은 데는 문상 가도 정승 죽은 데는 안 간다, 문전작라(門前雀蘿/문 앞에 참새 그물을 친다는 뜻으로 권력이나 재물을 잃으면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는 뜻)를 들먹이며, 세상이 다 그러려니, 세태만 한탄할 게 아니다. 나부터 송백 같은 존재가 되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



세한도에 새겨진 도장의 글귀는 '長毋相忘'이라고 한다. 장무상망.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라는 뜻이다. 각박한 오늘날 추사와 우선과 같은 사제지간은 물론이요, 어떤 인간관계에서든 오래오래 간직해야 할 글귀가 아닌가 싶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다시 한번 이 글귀를 되뇌어 본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장무상망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인가? 오래도록 우리 서로 잊지 말기를. 장무상망!

SE-299731c7-c310-4d5e-88c9-a979dff977cf.jpg?type=w1 <세한도>, 1844년, 23x69.2cm,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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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55df4e55-bf20-4d21-adc3-9b59cdfe91f2.jpg?type=w1 세한도에 새긴 장무상망
SE-1783aa26-6829-4ee0-99fe-744320d98820.jpg?type=w1 양평 세미원의 세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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