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면 으레 하는 일이 있었다. 낡고 해진 묵은 전화번호부를 새 전화번호부로 옮기는 것이다. 바뀌지도 않은 이름과 전화번호와 주소를 그대로 베껴 적는 작업은 분명 귀찮은 일이었지만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의식'이란 점에서 성스럽기까지 했다. 특히 사람의 이름 석 자를 적는다는 것은 얼마나 의미가 있는 행위인지, 이름만큼은 성의가 들어갔고 꾹꾹 눌러써 힘이 들어간 표가 역력했다. 그러다 보면 자연 전화번호부에 수록된 사람에 대해 선별 작업을 하게 된다. 그간 바뀐 친밀도에 따라 배열 순서가 바뀌기도 하고, 전화든 우편이든 연락할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의 주소나 전화번호는 새 것에다 옮겨 적지 않는다. 몇몇 사람에 대해 오랜 시간 생각을 가다듬기도 한다. 과연 연락할 일이 있을까, 혹시!, 어쩌면? ··· 일말의 가능성이나 새 전화번호부의 분실에 대비 묵은 전화번호부를 바로 폐기하지 않고 몇 년간은 보관하기도 했었다.
스마트폰 시대가 되니 그런 작업을 할 필요가 없어지긴 했지만 공허한 느낌도 든다. 한 명 한 명 마음속으로 호명해가며 얼굴도 그려 보고 이 생각 저 추억에 젖어들기도 했는데 말이다. 옛 전화번호부를 쓰레기 취급하여 폐기해버린 게 몹시 후회스럽다. 숱한 인연의 흔적들이 차곡차곡 쌓인 건데, 골동품처럼 오래오래 두고 볼 수 있는 건데.
스마트폰에 저장돼 있지 않은 몇몇 이름들이 그립다. 찰칵찰칵 동전 잡아먹는 공중전화기 소리도 그립고, 그때 그 사람들의 목소리도 그립다. 누구는 사무치게 그립기도 하다. 마음이 몽글몽글 그리움이 깊어지는 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