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파장>

by 길벗


파장(罷場)

-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 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신경림 시인(1935~2024)은 평생을 '민중과 함께한 시인'이다.

대표작 <농무>를 비롯

발표하는 시마다 민중의 절절한 삶이 녹아 있다.

이 시의 시대 배경은 60~70년대다.

파장(파할 파罷, 마당 장場)은 장이 끝나는 것,

잔치가 끝나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말한다.


빛바랜 흑백사진 여러 장이 동영상처럼 펼쳐지는 듯

자연보다 더 아름다운 시골장이다.

별다른 놀이문화가 없던 시절

이 마을 저 동네 친구들은

장날이 만남의 날이었을 것이다.

하루 종일 장터에서 놀다 먹다 마시다

파장이 되고 집에 갈 때는

그래도 장날인데 하고

몇 가지 손에 쥐고 어둡기 시작하는 길을 재촉했을 터.


요즘은 시골 오일장을 가더라도 별 감흥을 못 느낀다.

이제 더 이상 옛날의 재래시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푼의 에누리도 안 통할 것 같은 현대식 건물,

그리고 세트장처럼 어색하게 보이는 옛날식 난전.

오일장도 이제 거의 파장 분위기다.

난전에 쌓인 색색의 물건들만큼이나

소소하지만 훈훈한 정이 오가는 오일장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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