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뿌리의 길>

by 길벗


몇 해 전 가을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 오르는 산길,

수백 년 살아왔음직한 우람한 소나무들의 뿌리가

땅 위로 뻗어 나와 서로 얼키설키 얽히며

오름길의 계단이 되어주고 있었다.

풍파에 파이고 뭇사람들에게 밟히고 채이고 찍히면서

맹글맹글해진 뿌리의 길은 장엄하면서도 비감 어려

선뜻 밟고 오르기가 망설여졌다.

여느 산에서도 쉬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 까닭은

그 길 중간쯤에 걸려 있는

정호승 시인의 <뿌리의 길>이라는 시 때문이었다.


뿌리의 길

- 정호승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 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닦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 할

길이 되어 눕는다


-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시대적 희생을 빗대 지은 시지만

내게는 그 '뿌리'가 나의 부모님, 조상님으로 여겨졌다.

시는 내게 새삼 뿌리의 가치를 일깨워 주었다.

뿌리의 희생과 수고 없이

살아가는 생명체가 있을까.

차돌처럼 뭉친 근육이나 생선가시처럼

앙상하기도 한 뿌리 덕에

가지도 뻗어나가고

잎도 무성해지고

꽃도 피고 열매도 맺는 것.

바위 틈에서 몸을 이리 틀고 저리 틀며

멋스러운 가지를 자랑하는 소나무,

바람에 향을 내뿜고 죽어서는

멋진 배경으로 봉사하는 주목,

수백 년 풍상에도 그윽한 품격이 배어 있는

느티나무 역시 뿌리의 덕일 터다.

정호승 시인의 '뿌리의 길'을 되뇌면서

어느덧 뿌리가 된 나 자신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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