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다. SNS를 통해 새해 인사와 덕담이 오고 간다. 대개 받는 사람이 무시하고 마는 그렇고 그런 내용이다. 색다른 게 뭐 없을까, 생각하던 참에 옛 그림 하나가 떠올랐다. 5만 원짜리 지폐에 매화 뒤편으로 희미하게 겹쳐져 보이는 탄은 이정(灘隱 李霆/1554 ~ 1626)의 <풍죽도風竹圖>다. 한국 회화 사상 최고의 묵죽화로 평가받는 그림이라고 하니 그림 감상부터 하는 게 좋겠다. 풍죽,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다. 바람에 부대끼는 대나무 네 그루가 화폭에 담겨 있다.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담묵으로 그린 뒤의 세 그루를 보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마치 동영상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를 표현한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림을 볼 줄 몰랐기 때문이다. 미술사 학자인 고 오주석 선생의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이란 책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 가치를 알게 되었다. 단순하지만 깊은 수묵화의 맛을 깨우쳤다고 할까.
오주석 선생의 해설이다
"바람이 분다.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화폭 가득 세차게 부는 바람.
어린 대나무는 그 바람에 밀려 줄기가 활처럼 휜다.
매몰차게 부딪치는 바람은
댓 이파리들을 일제히 파르르 떨게 한다.
이파리는 곧 끊어질 듯 끝이 파닥이며 뒤집힌다.
화폭 중간 유난히 길고 가는 잔가지 하나.
이제라도 곧 찢겨나갈 듯 위태롭다.
하지만 저 기세를 보라.
쭉쭉 뻗어 올라간 줄기는
아래서 위로 갈수록 먹색은 흐려지지만
기백은 더욱 장하다.
잎은 위로 갈수록 더 짙고 무성하며,
낭창낭창한 잔가지는 탄력 속에 숨은
생명의 의욕으로 넘실댄다.
그렇다. 첫눈에 가득했던 것은 거친 바람이었지만
끝까지 남는 것은 끈질긴 대나무의 정신이다.
이정의 그림도 그림이지만 오주석 선생의 해설 또한 수작(秀作)이다. 드라마틱 하지 않은가. 흥미진진한 스포츠 경기 중계방송을 대하는 듯하다. 그의 안목도 안목이지만 관찰의 힘이 대단하다.
대나무는 매화 난초 국화와 함께 사군자(四君子)로도 알려져 있지만, 십장생(十長生)의 하나인 바위와 함께 그려 장수(長壽)를 기원하는 축수(祝壽)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옛날에는 대나무가 60년 만에 꽃이 핀다고 (잘못) 알았기 때문에 회갑 수를 의미하기도 했다. 개업이나 이전 등에 난을 주로 선물하지만 대나무 화분을 선물하는 것도 더욱 길한 뜻을 담아낸다고 한다. 대나무는 하늘 높이 치솟는 데다 생장 속도가 빠르고 순(筍)을 내어 숲을 이루기 때문이다.
대나무의 마디는 '쉼'을 뜻한다. 대나무가 폭풍우에도 꺾이지 않는 건 이 마디 덕분이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옆으로 튀어나온 마디가 스스로를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된다는 것. 중요한 사실은 이 마디가 만들어지는 동안 대나무는 키를 키우지 않는다. 사람이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일만 하는 게 아니고 놀든지 잠을 자든지 휴식을 취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면 된다.
대나무는 사군자(四君子) 중 겨울을 상징하니 댓잎 휘날리는 한 폭의 대나무 그림이나 대나무 화분은 연말연시 인사용으로 의미가 깊은 선물인 것이다. 새해 인사 새해 덕담을 전할 때 대나무의 여러 미덕과 함께 5만 원권에 새겨져 있는 탄은 이정의 풍죽도를 사진에 담아 같이 보내는 것도 괜찮은 아이디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