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했던 크리스마스 선물

by 길벗


'크리스마스 선물' 하면 생각나는 사건이 있다. 내 인생에서 황당한 사건 'Top 10'에 들 만한 이야기다. 1987년 내 나이 서른, 거의 술로 총각 갱년기를 겪어내던 시기. 종로구 계동의 사무실 근처에 가성비 높은 술집이 있었다. 내가 이 집에 얼마나 지대한 기여를 했는지 나보다 열댓 살은 많아 보이는 주인은 나만 가면 서비스 안주에다 공짜밥까지 내어놓기도 했다. 당시 나는 120명 사무실 직원들의 총무를 맡고 있었으니 나 역시 이 집에서 가성비 높은 고객이었던 것.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밤, 이 집에서 다음 날이 오는 줄도 모르고 마셔댔다. 다음 날 새벽 심한 갈증에 눈이 떠졌다. 당시 내가 묵고 있는 곳은 총각들만 살고 있는 직원 합숙소, 방 안에 냉장고도 없었다. 수돗물이라도 마셔야 했다. 문득 지난밤 술집 주인이 준 크리스마스 선물이 생각났다. 그렇게 마셔댔음에도 잃어버리지 않고 잘 가져와 책상 위에 보물처럼 모셔져 있었다. 저게 뭘까, 떠지지도 않는 눈을 비벼가며 대충 포장을 뜯어보니 기다랗고 시커먼 병에 영어로 뭔가 쓰여 있었다. 영어에다 검은색 병, 당시 나라 안에는 흔치 않던 감미로운 포도주스나 콕 찌르는 콜라 뭐 이런 건 줄 알았다. 급히 뚜껑을 열고 맥주 원 샷 하듯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한 100CC쯤 들어갔을까, 정체불명의 액체가 목젖을 타고 내려갈 때까지는 무슨 맛인지 모르다 식도를 건드릴 때쯤에야 비로소 느꼈다. 결코 내장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될 아주 역겨운 액체였던 것. 화장실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흡입량이 흡입의 역순인 식도 - 목젖 -입을 거쳐 밖으로 분출돼 나왔다. 내 속도, 방 안도 엉망이 돼 버렸다.



다음 날, 아니 그날 점심때 해장하러 또 그 집엘 갔다. 주인한테 물었다. 어제 주신 게 뭐냐고. 용도를 몰라서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간장 원액이란다. (결혼한 줄 알고) 집에서 요리할 때, 특히 생선 요리할 때 간을 하면 기막힌 맛을 낸단다. 세상에나! 내가 몇 시간 전 벌컥벌컥 들이마신 게 10배의 물로 희석해야 하는 간장 원액이라니. 그나마 먹는 것이라 안심이 되기는 했지만 속은 쓰렸다. 속이 간장처럼 새까맣게 타는 듯도 했다. 한동안 위장약을 달고 살았다. 아마 내 위장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나빠졌으리라.



5년 전 북촌 나들이를 갔다가 이 집을 찾아갔다. 점심도 아닌 저녁도 아닌 시간이어서인지 공복처럼 집은 비어 있었다. 하지만 30년 세월에도 옛 모습 그대로인 집과 옥호를 보니 포만감이 밀려오는 듯했다. 그렇다. 흘러간 세월에 대한 그리움은 지난날의 속 쓰린 추억도 아름답게 달래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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