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만 58살 되던 2015년 말 직장에서 정년퇴직 후 지금까지의 10년 세월을 반추해 봤다. 퇴직 후 5~6년간은 정말 좋았던 시절이었다. 그 지겨운 회의 안 하고 보기 싫은 사람 안 보고 한여름과 한겨울 출퇴근하는 수고도 하지 않으니 그것만으로도 됐다 싶은데 수시로 산을 찾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그야말로 유유자적, 아침에 눈 뜨는 것이 설레었던 명실상부한 나의 화양연화였다. 사실 퇴직을 앞둔 몇 년간은 더 빨리 그만두고 싶었다. 늙어지면 못 노나니라는 우리 옛 노래도 있지 않은가, 내 몸이 조금이라도 더 팔팔할 때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싶어서였다. 꿈이 백수였던 시절이었던 것. 직장을 나와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퇴직과 동시에 특별한 계획 같은 건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당시 버킷 리스트가 유행이었다. 인생 후반기,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하고 싶었던 일을 저장해 두고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는 것도 삶에 큰 의미와 재미가 있겠지만, 물정 모르는 노인들한테 가짜 약 팔아먹듯 은퇴 후 또는 죽기 전에 000은 꼭 해야 한다,라는 둥 사람들을 부추기고 가르치려 드는 게 마음에 안 들어 버킷 리스트를 뻥 차버렸다. 대신 생각해 낸 게 포기 리스트다. 나이 들면 몸에 이로운 무얼 하고 무얼 먹는 것보다 몸에 해로운 무얼 안 하고 무얼 안 먹는 게 더 이롭다는 판단에서다. 실천 항목들을 보면 절주, 금연, 소식, 체면치레 배제하기, 가기 싫은 모임 안 가기, 보기 싫은 사람 안 보기,.... 포기 리스트만 잘 지키면 나의 노년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잘 비켜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당장 실천이 쉽지 않았다. 담배야 어찌저찌해서 줄이고 줄이다가 겨우 2년 전 끊었지만 반주를 비롯한 술도 거의 옛날 그대로다. 포기해야 할 것들은 나를 위하는 일이지만 결국 나랑 싸우는 일. 싸울 상대가 없어 나랑 싸울 것인가, 지나치게 자신을 통제하다 보면 외려 스트레스가 생길 수도 있는 것. 결국 포기 리스트도 포기했다. 내 박약한 의지 가지고 안 되는 것들은 과감히 포기하고 내 몸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My Way다.
백수 갱년기도 겪었다. 퇴직 후 6,7년 차부터는 놀고먹는 것도 시들시들해지고 잘나가는 친구들을 보면 부러웠다. 나 자신이 비루하다고 느껴졌다. 문제는 추락한 자존감이었다. 종종 이런 기분이 든다. 아직 한창인데 왜 놀고 있냐? 고 아무도 묻지 않는데 추궁당하는 느낌이랄까. 자신을 존중하고 가치 있게 느끼는 마음가짐, 즉 자존감은 일에서 나온다. 일은 곧 돈이다. 돈을 좀 더 벌걸, 하고 후회가 밀려왔다. 그렇다고 정시 출퇴근에다 회의 등 꽉 막힌 생활은 죽어도 싫고 오로지 돈만 더 있었으면 했던 것. 사실 돈을 더 안 번 걸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은퇴한 이들의 글을 제법 많이 접해봤지만 돈에 대한 후회는 못 봤다. 나만 돈 밝히는 속물 덩어리인가 싶기도 하지만 돈 앞에 장사 없는 법. 돈 욕심을 나무랄 것도 아닌 것이 내가 이만큼이라도 살아온 것이 모두 돈 덕이 아닌가. 돈도 안 벌면서 일과 시간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 생활을 즐겼으니 이런 삶 또한 언제 누려본단 말인가. 돈보다 우선적으로 선택한, 돈은 안 벌었지만 그만한 가치는 한 삶이었다. 자기 합리화의 선수답게 이렇게 마음을 돌려먹으니 위안이 된다.
글쓰기를 계속해온 것에 대해서는 나 자신에게 칭찬해 주고 싶다. 퇴직 전부터 지금까지 공백 없이 15년째 써오고 있다. 처음에는 시간 때우기 성격이 강했는데 웬만큼 글이 모이다 보니 자산이 되는 듯도 해 뿌듯하다. 글감을 찾고 독서도 열심히 하는 자체가 삶의 무늬를 풍성하게 디자인하며 내 감성과 지성에 탄력과 향기를 불어넣어 준다. 추락한 자존감을 높여준 것이다. 뇌 건강에도 좋다고 하니 글쓰기는 멈추지 말아야겠다.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집 안에서 혼자 하는 홈트다. 산책을 겸한 유산소 운동 한 시간, 유연성 향상과 잘못된 자세 교정을 위한 나름의 재활 운동 40분, 그리고 근력운동 10~20분. 일주일에 5일 정도 2시간가량씩이다. 무료한 일상에 흥미와 보람, 활력을 불어넣어 주며 새로운 루틴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아 이젠 집콕을 즐길 정도가 되었다.
퇴직 후 백수 생활 10년. 소중한 시간인데 너무 무계획적으로 살아온 게 아닐까란 후회도 한다. 사실 삶이 계획대로 바람대로, 노력한 만큼 순조롭게 펼쳐지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아직 이런 말을 할 연륜은 안 되지만, 모든 것은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깨닫기 힘들고, 큰 계기 없이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그러고 보면 아무런 계획 없이 살아지는 대로 사는 것이 삶의 요령일지도 모른다. 자유롭고 싶은 노년에 새로운 진로나 목표를 정한다는 건 와이셔츠에 넥타이처럼 스스로를 옥죄는 행동인 것. 그것보다는 노 타이 차림의 자유로운 영혼으로 남아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고, 물 흐르듯 꽃 피듯 살아가자는 거다.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파도치면 파도치는 대로 흔들리며 살아가는 조금은 달관의 자세가 필요한 게 노년의 삶의 해법이 아닐까.
아직도 뚜렷한 인생철학 같은 건 정립하지 못했지만 내가 인생 명언이라고 꼽은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게)를 내 삶의 지침이라 여긴다. 지나친 욕심을 경계하면서 나름 멋스러운 노후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설사 이루어놓은 건 없다 하더라도 그간 살아온 세월만으로도 성공이요, 훈장 감인데 스스로 주눅 들고 남루해져서야 되겠나!
가진 것들 내에서도 행복을 누릴 수 있고 몸 편하고 마음 편한 게 최고의 삶이다. 하루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마음을 억누르는 큰 고민거리 없이, 마음에 걸리는 것 하나도 없는 나날들이 이어지길 바라며 언젠가 열창을 해보리라 마음먹었던 <My Way>를 읊조려 본다. "Regrets, I've had a few But then again, too few to mention(약간의 후회도 있겠죠. 하지만 말할 정도는 아닐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