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옛사람들의 갑질

by 길벗


옛 그림이나 글을 보면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는 데는 계절 불문이요, 날씨 불문이다. 눈 온 날 멀리 벗을 찾아가고 교통도 여의치 않은데 금강산을 유람한다. 그런데 짐을 나르거나 시중 또는 길 안내를 위해서 데리고 가는 사람이 있다. 어린 시동 아니면 머슴이나 절집의 중이다. 이들에게는 즐거운 나들이나 여행이 아니라 힘든 고행이었을 것이다. 요즘 회자되는 '갑질'이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옛 선비들의 고고한 아취 이면에는 어린아이들과 노비, 머슴, 스님 들의 애환과 수고와 고통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당연시되는 일이라 그런지 오늘날의 작품 해설은 (열악한 여건과 환경 속에서도) 운치와 낭만을 즐기는 우리 선조님들!이라는 평 일색이다. 무조건 '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라는 지나친 문화적 국수주의는 듣기에 민망하다.


몇몇 그림을 보자. 이인문의 <달밤의 솔숲>이다. 달이 휘영청 떠 있는 밤, 사내와 시동이 솔숲을 거닐고 있다. 역시 짐은 어린 시동의 몫이다. 시동의 짐은 등롱만이 아니다. 거문고로 보이는 무언가를 들고 간다. 시동의 머리가 아래로 향한 까닭은 손에 든 것들의 무게 때문만은 아닐 터. 어린 시동의 입장에서는 잠자는 게 더 좋을 텐데 시큰둥할 수밖에.

SE-759e0c40-66bb-48e0-8074-4a686681f271.jpg?type=w1 이인문, <달밤의 솔숲>, 18세기, 종이에 담채, 24.7x33.7cm, 국립중앙박물관
SE-1d8899b1-913a-454d-abe5-37101b4cd98f.jpg?type=w1 <달밤의 솔숲> 세부도


이인문의 <설중방우 雪中訪友>다. 눈 온 날 벗을 찾아간다는 것. 방안에 두 친구가 만나 담소를 나누고 아래쪽 사립문에는 이 집의 시동이 주인을 모시고 온 시동을 맞이한다. 손 곱고 발 시린 처지를 잘 안다는 듯 어서 들어오란다.

SE-041adb4f-3ba5-45a3-9e3c-72a9093b1714.jpg?type=w1 이인문, <설중방우>, 18세기, 종이에 채색, 38.2.7x59cm, 국립중앙박물관


눈을 밟고 매화를 찾아가는 김명국의 <답설심매도 踏雪尋梅圖>다. 역시 말을 끄는 시종이 눈에 밟힌다.

SE-0eca7ac7-82f2-4c60-bcef-9d23372999cf.jpg?type=w1 김명국, <답설심매도>, 17세기, 모시에 수묵 담채, 101.7 x 54.9cm, 국립중앙박물관


대개 이런 구도다. 선비는 지팡이 정도만 쥐고 있어 발걸음이 가볍고, 어린아이는 짐 실린 말을 끌거나 직접 짐을 들고 가기에 힘들어 보인다. 그림 전체에 대한 감상을 떠나 애처롭고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등 따시고 배부르기만 하면 되는 어린 시동의 입장에서는 한밤중에 길을 나서고 탐매(探梅)를 즐기겠다고 얼어붙은 산길을 오르는 등 풍류란 참으로 이해 불가다.


전해오는 얘기가 있다. 온 천지가 얼어붙은 한겨울, 선비가 눈 속에 핀 매화도 보고 친구와 회포도 풀 겸 해서 머슴에게 말을 끌게 하고 길을 나선다. 눈길과 빙판길을 거쳐 꽁꽁 언 강물을 아슬아슬 통과하다가 말의 무게 때문에 얼음이 푹 꺼져버린다. 그러자 말을 타고 있던 나리가 물속으로 첨벙 빠지게 된다. 다행히도 말 옆에서 걸어가던 머슴은 물에 빠지지 않고 엉겁결에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나리의 상투를 쥐게 된다. 이제 이 상투에서 손을 떼면 나리는 끝장이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 "야, 이놈아, 뭐 하느냐, 빨리 날 건져라" 머슴이 상투를 쥔 손에 힘을 살짝 빼면서 대꾸한다. "나리, 살려줄 테니 두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뭔데, 빨리 말해." "이렇게 추운 날에는 바깥나들이를 하지 않겠다는 것과 내 마누라 더 이상 집적거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고고한 아취 이면에는 어린아이들과 노비, 머슴, 스님 들의 애환과 수고와 고통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작품들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은 '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라는 문화적 국수주의를 떠나 솔직하고 객관적으로 바뀌면 좋겠다. 그림 자체보다 그림에 깃든 정신이나 배경, 서사를 중시하는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한편으론 부끄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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