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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 · 융건릉(경기도 화성)

사도세자를 기리는 정조의 효심

by 길벗


용주사(龍珠寺). 사도세자(1735~1762)의 위패를 모신 절이다. 사도세자가 묻힌 융릉의 능침(陵寢) 사찰(능을 수호하고 왕이 제사를 지내던 절)이다. 사도세자가 누구인가. 28세의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 만에 숨을 거둔 비운의 왕세자다. 부왕인 영조는 뒤늦게서야 아들을 죽인 것을 크게 후회하여 '생각하고(사思) 슬퍼한다(도悼)'라는 뜻으로 시호를 내렸고, 이후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正祖)는 부친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경기도 양주에 있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고 하는 이곳 화산의 융릉으로 옮기고 용주사를 능사(陵寺)로 삼았다. 당시 용주사라는 절은 없었다. 신라시대 창건 당시의 절 이름은 갈양사,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 숭유억불 정책을 펴는 조선시대에 폐사지인 이곳에 다시 절을 세웠으니 사도세자를 기리는 그의 아들 정조의 효심이란! 오늘날 용주사가 '효찰대본산'이란 칭호를 얻게 된 연유이고, 부모님의 은혜를 새긴 부모은중경탑도 경내에 있다. 부처의 도량에서 효도의 상징물이 있다니! 의외였다. 그러나 불심과 효심, 이 역시 둘이 아니라 하나, 곧 부모님의 은혜 역시 부처의 공덕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서가 아닐까.


이어 1km 떨어진 융건릉을 걸었다. 융릉과 건릉. 융릉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모신 합장릉이고 건릉은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와 효의왕후를 모신 합장릉이다. 왕릉에 들어서면 깊은 산중의 절집에 들어서는 것처럼 마음이 안온해져 '무덤'이라는 생각보다 호젓한 산책코스라는 느낌이 든다. 사색과 산책의 즐거움이 넘친다. 울창한 수목에다 터가 좋아서일 것이다. 산사 역시 '위대한 영웅(大雄/부처)'을 모신 명당에 자리 잡고 있듯이 왕릉 또한 선왕(先王)을 모신 곳이기에 천하 명당자리다. 좁고 컴컴한 뒤주 안에 갇혀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부친을 생각, 정조는 온종일 햇볕을 잘 받을 수 있는 보다 넓고 환하고 아늑한 터를 잡았을 것이다.


4월 25일, 어버이날과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찾은 용주사. 연꽃 바다처럼 펼쳐진 수많은 연등 중 부모님을 위한 등은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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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홍살문이 나온다. 붉은 단청의 홍살문은 악귀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표시이기도 하고

신성한 장소를 나타내기도 한다. 홍살문은 왕릉 등지에서는 쉽게 볼 수 있으나 사찰에서는 보기 드물다.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위패는 호성전이란 전각에 모셔져 있다.


뒤로는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삼문이다. 중앙 문이 대문이고 양옆으로 또 문이 있다. 아마 사도세자를 모신 융릉의 능침사찰인 까닭이 아닐까 싶다. 무덤인 능의 경우, 영혼이 다니는 길인 신도(神道), 왕이 다니는 길인 어도(御道), 그리고 신하들이 다니는 길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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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은중경탑(父母恩重經塔).

예전에는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신 호성전 바로 앞에 있었는데 새로 만들었는지 지금은 효행 박물관 바로 앞이다. 탑에 새겨진 부모님의 은혜 10가지를 보면,

첫째, 아이를 뱃속에서 지켜주고 보호해 주신 은혜

둘째, 해산할 때 고통받으신 은혜

셋째, 자식을 낳고서야 근심을 잊으신 은혜

넷째, 쓴 것은 삼키고 단것은 뱉어서 먹여주시는 은혜

다섯째,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누이 주시는 은혜

여섯째, 젖 먹여 길러주시는 은혜

일곱째, 손발이 다 닳도록 더러움을 씻어주시는 은혜

여덟째, 먼 길 떠날 때 걱정하시는 은혜

아홉째, 자식을 위해 나쁜 일까지 하시는 은혜

열째, 임종 때도 자식을 걱정하시는 은혜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로 시작되는 '어머님 은혜'란 노래 가사와 비슷하다.

스스로 국보라 칭하던 양주동(1903~1977) 선생이

'부모은중경'이라는 찬불가에서 영감을 얻어 가사를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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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건릉 재실 앞에 뿌리내리고 있는 향나무. 왕릉에는 어김없이 향나무가 있다. 제사를 모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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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릉.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다. 원래 사도세자는 임금이 아니었으므로 능에 묻힐 자격이 없었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존호를 장헌으로 올렸고 이후 장조로 추존되었던 것. 능(陵)은 왕과 왕비를 모신 곳. 원(園)이라고 하는 무덤도 있다. 이는 세자나 세자비 및 왕이나 세손을 낳은 후궁의 무덤을 일컫는다. 혜경궁 홍씨는 궁중문학의 백미라고 하는 <한중록>을 남겼다. 사도세자를 기리는 능이서인지는 몰라도 묘한 생각이 든다. 소나무의 구부러진 모습이 뒤주 안에 갇힌 사도세자를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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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은 부친의 묘를 오갈 때 고갯마루에 올라 "왜 이리 늦게 가느냐"라며 길을 재촉했고, 한양으로 돌아갈 때는 부친 곁을 떠나는 아쉬움으로 신하들한테 "천천히 가자"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후세의 사람들이 이 고개를 '지지대 고개'라 불렀다. '더디게 더디게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 정조가 능 행차 중 읊었던 시가 있다. 그의 지극한 효심을 알 수 있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사모하는 마음 다하지 못해 오늘 또 화성에 왔구나. 부슬부슬 비 내리니 배회하는 마음 둘 곳이 없어라. 여기서 사흘 밤만 머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네. 더디고 더딘 길 아바마마 생각하는 마음, 흘러가는 구름 속에 생기네."


용주사와 융건릉. 두 곳 다 주차료는 무료다. 바로 앞에 몇 곳의 괜찮은 음식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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