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산수화를 보면서 실망한 경우가 많았다. '보는 눈'이 없는 나 자신을 탓해야 하지만 당시 서양의 화가들처럼 화려하고 그럴듯하게 그리지 못한 우리 선조들에게 아쉬움을 많이 느꼈다. 실제 모습보다 터무니없이 높게, 크게 묘사한 산이나 나무, 폭포 등을 볼 때 과장법에 능한 우리 선조들 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도록 등을 통해 작품 해설을 보고 공부하면서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우리 산수화를 나에게 가르쳐 준 작품 중 하나가 겸재 정선의 <만폭동도>다. 세로 33cm, 가로 22cm로 어른 손바닥만 한 작은 화폭에 금강산 일만 이천 봉도 우뚝 서 있고 그 아래로는 골바람이라도 불었는지 계곡물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산자락 아래에는 여백을 두어 신령한 산안개를 묘사했고 나무들은 사선으로 그려 마치 계곡 전체가 춤사위를 보여주는 듯하다. 특히 수직으로 뻗은 낙락장송들을 춤추게 한 겸재의 실력이 돋보인다. 아주 큰 화폭에다 자연의 색 그대로 그렸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당시의 여건으로 볼 때 화구를 갖고 먼 길 나서기도 어려웠으리라 짐작된다.
오른쪽 위의 화제는 중국의 고개지(344~405 추정)의 글이다.
千巖競秀(천암경수) 온갖 바위 경쟁하듯 빼어나고
萬壑爭流(만학쟁류) 온갖 계곡물 다투어 흐르는데
草木蒙籠其上(초목몽롱기상) 초목이 그 위를 덮고 우거지니
若雲興霞蔚(약운흥하울) 구름이 일고 아지랑이 자욱하네
"천암경수 만학쟁류"는 금강산의 만폭동 바위에도 새겨져 있다고 한다.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자 조선 후기의 문인 · 화가 · 평론가인 강세황(1713~1791)은 이렇게 말했다. "그림은 산수화가 가장 어려운데, 그것은 산수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또 진경(산수의 참모습)을 그리는 것이 어려운데, 닮게 그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지역을 그리는 것이 가장 어려운데, 어림짐작으로 닮게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풍경이나 사람을 실제처럼 꼭 닮게 그리는 표현법은 궁에 소속된 전문 화원들이나 하는 격이 낮은 것으로 여겼다. 사대부처럼 신분 높은 사람들은 자신의 인격이나 생각이 반영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좀 더 품위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서울 한복판에서 태어나고 자란 겸재 정선이 시퍼런 동해를 보고 어떤 감흥이 일었을까. 바다의 스케일에 압도되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대자연 앞에 인간은 한낱 미물임을 표현하기 위해 바다는 사람 위로 넘실대고 절벽은 아찔하게 묘사했다. 이런 감흥을 담아 그린 작품이 <문암>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