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장에 강 같은 평화

by 길벗


솔직히 고백한다.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급해서였다. 그것도 큰 볼일이었다. 사정은 이러했다. 근 40년 전이다. 잠실 부근의 회사 독신자 숙소에서 시내 사무실까지 통근버스를 타고 출근을 했었다. 때는 5월 중순인데 그날따라 아침부터 좀 더웠다. 버스가 올림픽대로에 접어들자마자 직원들이 에어컨 켜달라고 기사한테 청을 넣는다. 친절한 기사님의 신속하고도 과도한 친절 봉사 정신 때문에 나는 몸까지 오싹할 정도였다. 종합운동장 부근에서 길이 꽉 막혀 있었다. 순간 나의 과민성 대장이 과민하게 반응했다. 아랫배가 살살 아파지기 시작했던 것. 심리 상태에 따라 좌우되는 장의 컨디션이니 차라도 씽씽 달리면 안정이 될 텐데 가다 서다를 반복하니 더 불안했다. 불안해지니 본격적으로 기별이 왔다. 부글부글 끓는 듯했다.


몇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식은땀 삐질삐질, 좌불안석, 전전긍긍. 절체절명의 순간에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결국 차 안에서 재채기 터져 나오듯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될까···, 수십 명의 후배 직원이 보고 있는 이 좁은 공간에서··· 그럼 당장의 일(?) 처리도 그렇지만 소문이 수천 명의 직원들 귀에까지 들어갈 텐데, 결혼하기 딱 좋은 나이인 나는 거의 절망 상태였다. 대안은 없었다. 급하다고 차에서 내려봤자다. 올림픽대로에는 화장실도 없고 대로는 대로답게 차로 가득하고. 저 멀리 보이는 동호대교만 건너면 바로 지하철역이고 지하철역에는 어김없이 화장실이 있으니 강만 건너면 내 장에 강 같은 평화가 올 터인데. 그렇게 일촉즉발 비상상태는 지옥 갔다 천당 갔다를 몇 번 반복하며 30분가량 계속됐고 나는 오로지 정신력 하나만으로 잘 버텨냈다.


마침내 동호대교를 건넜다. 화장실에 들어서니 담배 연기 자욱한 채 만원이었다. 급한데 어쩌겠는가, 바로 옆집으로 갔다. 아뿔싸,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문까지 치켜든 숙녀분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 그제야 좀 안심이 되었다. 하다못해 이제 여기서 어떻게 되더라도 아는 사람도 없으니 크게 뭐(?) 팔릴 일도 없다. 그러더니 그렇게 애태우게 하던 것이 쑥 들어가고 말았다.


이후로 버스 트라우마가 생겼다. 막히는 도로 트라우마까지. 바로 그다음 날부터 공짜 버스 대신 불편과 비용을 감수하고 전철을 이용했다. 지금도 장시간 걸리는 버스는 못 탄다. 열차 또는 언제든 정차할 수 있는 승용차만 이용한다. 승용차도 길이 막힐 것 같으면 좌불안석이다. 그래서 늘 샛길을 염두에 두고 운전을 한다.


문제는 장의 건강이다. 장 건강의 시작과 끝은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 몸이 따뜻해야 몸이 산다,라는 책도 있지 않은가. 반성하자면 오래전부터 냉수, 그것도 한겨울에도 꽁꽁 얼린 얼음 물만을 마신 탓이 크다. 몇 년 전부터 냉수를 끊고 따뜻하거나 미지근한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요즘은 아침마다 따끈한 생강차를 마신다. 과민하던 장이 많이 완화됐지만 트라우마는 대장의 길이만큼이나 길고도 길어 아직도 여전하다. 과민성대장 증후군으로 고통받는 이들은 무조건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 내 장에 강 같은 평화를 위해.

SE-8c3dd8db-f446-462c-882d-65cff923a480.jpg?type=w1





keyword
작가의 이전글겸재 정선 <만폭동도> · <문암> · <총석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