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의 대화 중 가장 애통하고 가슴 아린 얘기가 요양원에 계신 부모님 뵙고 왔다는 거다. 오래전 들었던 친구 얘기다. 노모를 요양병원에 모시고 간 첫날, 헤어지면서 곧 어머니 모시러 오겠다고 한 인사말이 결국은 어머니가 세상 떠나자 모셔 온 게 되었다는 말을 할 때는 나까지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결코 남의 일이 아닌지라 이런 말을 들으면 곧장 자기화를 해본다. 내 부모님, 내 아내 그리고 나까지. 한숨만 나올 뿐이다.
삶의 질과 함께 죽음의 질도 깊이 생각해 본다. 죽을 때까지 정신도 명료하고 사지도 멀쩡해 자유 의지대로 움직이고 먹고 싶은 것 먹고, 그리고 깊은 잠에 빠진 듯 고요히 이승을 떠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런 죽음이 있기나 할까 싶을 정도로 희귀하다. 대부분의 사람이 겪는 죽음의 고통은 지옥 수준이다. 의료기계에 의지한 채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그렇게 되어 본인도 힘들고 가족과 주변도 힘든 상태, 인간다움과 존엄은커녕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죽음의 과정이야말로 고통의 바다, 즉 고해(苦海)의 한가운데에서 허우적대는 격이다. 극한의 고통 상태에서 돌봄 부재로 인한 고독사, 간병 살인 등 존엄하지 못한 죽음은 얼마나 많은가. 뿐만 아니다. 심장마비로 죽는 게 가장 편하니 약을 끊겠다는 이들, 가족들에게 극심한 트라우마로 남을지도 모르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차라리 나은 편이라는 말에서는 비장함보다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재판 결과에 따라 독약을 마시고 조용히 숨을 거둔 소크라테스의 죽음, 품위 있는 죽음을 선택하면서 곡기부터 끊었다고 하는 스콧 니어링의 사례도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누군가의 병과 죽음이 의료계에 큰돈이 된다는 사실, 그로 인해 존엄사 관련 법 제정은 하세월인 현 상황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분노까지 치밀어 오른다. 오죽하면 중병을 앓고 있는 상태에서 저 먼 나라 스위스까지 가서 값비싼 조력 존엄사를 택할까.
삶의 마지막 순간에 맞닥뜨리는 삶의 비애. 인간으로서 어떻게 존엄을 유지하며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생을 마무리해야 할지 답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백세시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재수 없으면 백 살까지 산다'라는 자조적 농담이 결코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악담도 이런 악담이 없다. 시 두 편이 가슴을 후벼판다.
도축장
- 용혜원
늙은 소가 평생 일하고
도축장에 울면서
끌려간다
병든 아버지가 평생 일하고
요양원에 말없이
들어간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수족관의 물고기
- 나태주
죽지 못해 사는 목숨입니다
죽기 위해 사는 목숨입니다
죽고 싶어도 죽어지지 않는 목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