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효, <내가 졌다>

by 길벗



내가 졌다

- 윤효(1956~)


주룩주룩

비 내리는 아침이었다

우산 둘이 비켜갈 수 없는 좁다란 길 저만치

네가 오고 있었다

한 손엔 보조가방을 들고 있었다

우산 접고 비켜줘야지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비 맞으며

네가 먼저 비켜섰다


어린 것이 어른을 이기다니

버릇도 없이


- 살다 보면 이럴 때가 있다.

양보든 배려든 좋은 일이라 생각돼

내가 먼저 하리라 맘먹고 있었는데

이런! 상대방이 먼저 선수를 치는 거다.

그렇게 허를 찔렸을 때는

기분 좋으면서도 왠지 서운하고 당혹스럽다.

그런데 그 상대방이 아주 어린 사람이라면.


시란 반드시 말맛 땡기는

그럴듯한 시어(詩語)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다.

심오한 의미, 그런 거 없어도 된다.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일을 발견하고

그것을 그대로 옮기는 것.

시를 모르는 내 생각이지만

나는 이런 단순함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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