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의 150년 온도차
2016년 처음으로 일본 도쿄를 방문했다. 나에게 일본은 한국과 비슷한 곳일 거라는 인상을 주는 나라였다. 하지만 처음 도착한 일본에서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나의 일본에 대한 인식이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는 것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즉 내가 실제 보고 느낀 첫인상에서 일본과 한국은 전혀 다른 나라였다. 이 신선한 충격이 계기가 되어 이후 나는 일본에서 거주하며 어학연수를 수료하였고 지금도 나는 일본학을 공부하고 있다.
과연 무엇이 일본과 한국의 차이를 만들었을까?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150여년전 서양에 의한 아시아의 개항이 시작된 시기로부터 그 원인을 찾아보고자 한다.
2017년 촛불 혁명으로 문 정권이 수립되었다. 북한과 평화 회담을 위해 판문점에서 만남을 가졌고 평창 동계올림픽 등 정권 초반 통일에 대한 문 정권의 노력을 보며 드디어 한국의 통일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희망했다. 하지만 하노이 합의 불발 이후 북한과의 관계는 다시 수면 아래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한일 관계마저 악화되기 시작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이해서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는 2019년을 지나 아직까지 한일관계는 과거의 족쇄를 풀지 못한 채 진행중이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남북관계 개선과 한일관계의 회복이 필요하다. 유일한 분단국가 한반도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생명체가 전쟁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일상의 온전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한반도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갈등 상태를 끝내야 한다.
2000년 미국식 자본주의 확산과 IT 정보통신 산업의 발달로 한국은 고도의 성장을 계속해왔다.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하였지만 수도권과 지방의 생활차이, 국민의식, 개인의 행복지수, 삶의 질 등은 그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불안정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 창조적인 돌파구를 찾을 것인가? 아니면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변화의 흐름속에 내맡긴 채 살 것인가? 이러한 나의 생각과 질문을 바탕으로 일본 개화기의 계몽사상가이자 교육가 후쿠자와 유키치를 통해 일본과 한국의 지난 150년의 온도 차이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34년 오사카 출생으로 일본 개화기의 계몽사상가이자 교육가이다. 메이지 유신의 주역 중 한 명으로 일본인들 중 특히 지식인들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막부 정치 대신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개혁할 것을 추구하였다. 한때는 진보주의자로 일본 근대 초기 인권 운동가적 면모를 보이며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적 라이벌이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자유주의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또한 일본의 봉건주의 사회와 타락한 정치를 개혁할 필요성을 설파하며 서양언어와 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난학을 전공한 그는 에도의 요코하마에서 난학이 통하지 않음을 알고 독학으로 영어를 배웠으며 1860년 막부의 사절단으로 미국과 유럽 러시아를 순방하였다. 그리고 귀국 후 미국의 정치, 역사, 문화를 담은 서양사정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일본 최초의 사립대학인 게이오 대학을 설립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메이지 정부에서 그를 등용하려 했지만 어린시절 문벌사회에 대한 깊은 불만을 갖고 있었기에 천황을 받드는 정부에 대한 반감으로 거절하고 학문과 교육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 라는 문장과 ‘학문의 권함’이라는 책을 통해 현인과 우민의 차이에는 배움과 배우지 않음에 있음을, 국민들에게 합리적인 생각과 생활태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쳤다. 이를 통해 잘못된 습관과 미신을 없애는데 큰 역할을 하였지만 일본 특유의 학력위주 사회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유럽 순방 중 영국의 공리주의 사상 하에서 실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개인의 자립이 곧 국가의 독립이고 개인의 왕성한 발전만이 자본주의 발전의 기본이 되는 것을 강조하며, 군비 확충, 조세, 관민협조 등을 통해 서구 열강의 대열에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청과 조선의 개화를 지지하였으나 1884년 갑신정변에 실패하자 탈아론을 내세우며 오히려 변화와 혁명을 하지 않으려는 조선과 청을 비판하였다. 그는 김옥균을 위시한 개화파를 지원하고 보호하며 조선의 친일파의 대부 역할을 하였다.
후쿠자와에게 있어서 메이지 유신의 가장 큰 의의는 세습 신분제의 붕괴를 통한 사민평등의 시대가 가져온 해방감이다. 동시에 서양국가들과 주권국가로서 대등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지만 언제 굴복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천부인권론 사상을 내세웠다. 1870년의 일본사에서는 없었던 새로운 사상으로 하늘이 낳은 모든 인간은 동등하며 주어진 것을 통해 행복을 실현하는 것이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권리이다. 라는 일본의 봉건주의 계급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개인의 천부인권이 국가보다 우선되어야 하고 국가는 이를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 기본 발상이다.
후쿠자와는 서양 순방을 통해 “서양인은 개인으로 존재한다.“ 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19세기 서구 정치사상에서 자유주의란 권력이 개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범위를 명확하게 한정하고, 권력의 남용이나 침해로부터 개인의 자유 영역을 철저하게 지키고자 하는 사상 및 운동이다. 기존의 에도 사회에서 인간은 ‘개인’일 수 없었다. 후쿠자와의 문벌사회에 대한 저항과 당시 서양의 자유주의 사상이 맞물리면서 그의 사상에서 자유주의적 성향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메이지 유신 직후의 일본에서 직면한 현실은 아직까지 국가라는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인민 개개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1870년대 일본의 상황은 “귀천상하의 구별 없이 나라를 자신의 일로 받아들여”야 하는 능동적 주체로서의 국민이 필요한 시점이었으나 인민에게 그와 같은 “문명의 정신”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집필 배경속에서 <학문의 권장>은 국가-정부-인민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다.
추상적이고 막연한 자유와 독립의 논의로 국가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계도하여 국민들의 인식을 변화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조국을 위해서 “소유물과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애국심을 강조하여 국민을 계도하는 방향으로 바꾸었다. 결국 <학문의 권장>에서의 고민이란 이상과 같은 새로운 정치체제로 바뀐 일본이라는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으로서, 즉 ‘개인’이라는 존재로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세습신분제 사회를 벗어나 사민평등의 시대가 도래한 1870년대 일본은 누구나 노력에 의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여기서 ‘학문’이란 그저 글을 읽는 것이 아닌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독립된 주체로서의 삶을 위한 ‘실학’의 학습을 의미한다.
도쿠가와 정권이 붕괴되고 메이지 신정부가 들어서자, 서양 사상의 수용을 통해 ‘문명개화’를 이룩하고자 한 지식인들에게 도쿠가와 시대 교양의 기초였던 유학은 극복 혹은 부정해야만 하는 과거의 유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정부로부터 독립한, 즉 위로부터의 명령에 순종하고 아첨하지 않는 ‘개인’이 학문을 통해 ‘문명’의 진보를 이끈다고 생각하던 그는 “문벌전제의 통치”를 지탱한 장본인으로 유학을 지목하였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그러한 억압적인 체제 속에서 인민의 ‘지덕’이 진보하자, 그들이 문벌전제에 대한 반감과 그로부터의 해방을 원하게 됨으로써 실현된 운동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후쿠자와는 결코 처음부터 끝까지 서양이 문명의 끝에 달한 세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서양의 문명을 받아들여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아시아만의 문명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양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교육과 개인의 발전을 통해 세상을 더 낳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사상가이다. 이러한 후쿠자와의 사상은 일본의 근현대 시대를 지나며 일본인들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글의 서두에서 내가 느낀 일본의 첫인상에서 한국의 그것과 다름을 느낀 순간은 바로 이러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일본식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에 대한 것임이 분명했다.
한국 사회는 아이, 청소년, 어른, 노인 등으로 인간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단계별로 나누어 구분하는 특징이 있고 보이지 않는 장벽을 만들어 자신과 비슷한 공감대를 지난 사람들과 그룹을 형성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 강하다. 우리가 존재할 뿐 ‘나’라는 개인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무리속에 존재하며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자신 고유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이며 그 속에서 매몰되어 가는 것이다. 개인이 없는 사회에서 창의성과 독창성은 나올 수 없다. 나의 생각보다 우리의 생각이 중요시 될 때 나는 없어지는 것이다.
물론 일본도 집단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면도 있지만 개인과 자아를 중시하는 것이 기본 전제가 되어 있다. 우리 주변에는 인생을 살면서 나이 30, 40이 되어도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왜 그런 것일까? 그것은 한 번도 진지하게 자신의 ‘호불호’에 대해서 고민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에 대해 집중하는 시간을 갖기보다 항상 주위를 신경 쓰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정해진 틀안에서 우리라는 울타리 안으로 자신을 맞추는 것에만 신경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기준에서 벗어나 보이는 것을 경계한다. ‘나’라는 ‘자아’는 학생, 사회 초년생, 직장인, 교사, 사업가 등 어떠한 타이틀로써 존재한다. 하지만 그 타이틀이 벗겨지는 순간, 혼란이 시작된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을 마지막으로 내가 느낀 한국과 일본의 온도차이를 정리해본다. 150년전 일본의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를 통해서 그의 사상과 철학이 일본과 국민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확인해 볼 수 있었다. 국가의 발전의 원동력에는 외형적인 성장과 내적인 성숙한 국민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전후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하지만 우리의 외적인 성공 이면에는 잃어버린 우리의 내적 성찰이 있었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시대를 지나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우리는 내면에 대한 성찰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외형적인 성장통을 감내하며 지난 70년을 지나왔다. 한국을 선진국으로 이끌었던 앞선 세대들의 커다란 희생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다음 세대를 위해 자신들을 희생하였다. 마지막으로 한국과 일본의 150년의 온도차를 맞추기 위해서는 선진국에 걸맞는 국민 개개인의 내적인 성숙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