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yeong Jun 23. 2022

내 고향 초여름 풍경

고향 친구와 번개팅하다

고향이 있어서 좋다!


 전라북도 익산시 유천 도서관 옥상에서 내려다본고향의 초여름 풍경은 생기가 있어 활력이 느껴진다.

어느새 6월 초순, 모내기로 들판을 채워가고 있다. 노란 들판은 아마도 추수를 앞둔 보리가 익어가는 모습인 듯하다.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만경강이 흐르는 곳에 조금 못 미친 곳이 내 고향이다. 이곳은 도시화와 농촌의 풍경이 자연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어색하게 어우러진 소도시이다.

내가 익산 시내에 위치한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닐 때다. 대학입시로 전국의 동급생들이 시험공부가 한창일 때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매년 6월 초순이면 전교생들이 농번기를 맞아 모내기하는 농촌으로 가서 모내기 봉사를 하였다. 그러면서도 입시학원에 개인과외까지 해가며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하는 대도시 동급생들과 정정당당히 겨루어 경쟁을 해야 했다. 엄밀히 따지면 이는 정정당당한 대결은 아니었다. 한쪽으로 기우는 불공평한 경쟁이었다.  불공평한 입시전쟁을 치르면서도 나와 친구들은 불평도 할 줄 몰랐다. 그저 해맑았고 정다웠고 감수성이 깊었던 여고시절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가 그립다. 고향을 찾을 때마다 꿈에 부풀었던 십 대 시절이 떠올라 미소 짓는다.

문명의 혜택이 절대 빈곤했던 시골 마을에서 밤마다 서울 가는 날을 꿈 꾸곤 했었다. 하지만 정작 꿈에서 그리던 서울에 살게 되었을 땐 다시 고향이 그리웠었다. 속상하고 답답할 때 고향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가면 어느새 마음이 후련해지고 저절로 힐링이 되었었다. 타향살이로 나이가 들어갈수록 훌쩍 집을 떠나서 다녀올 고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고향 친구가 있어서 좋다!


 며칠 전 코로나19 때문에 3년 가까이 비대면으로 안부만 주고받던 고교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친구와 난 동시에 '쇠뿔도 김에 빼랬다고 우리 당장 만나자!'라고 의견을 맞춘 뒤 번개처럼 만나

점심 먹고 차 마시고 폭풍 수다 후 인증숏까지 하고 헤어졌다. 언제 보아도 방금 전에 만났던 친구처럼 익숙하기만 한 고향 친구다. 이야기 소재도 수시간이 지나도록 무궁무진하다. 아쉬움을 남기고 절제를 해야 할 정도로 친구와 난 다양한 소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향 친구와 만난 후의 내 소감은 비 온 후 개운하고 상큼한 느낌, 딱 그런 감정이다. 현실 생활로 복잡하게 얽힌 감정들이 고향 친구를 만나면 절로 녹아지는 느낌이다. 마음의 고향 같고 보석처럼 소중하기만 한 고향 친구가 있어 참 좋다.


고향은 마음의 안식처다


고향은 향토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막걸리 같은 이라면 고향 친구는 서까래 밑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된장 같은 느낌이다. 막걸리는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좋아하셨던 음료이고 천장에 매달린 된장은 고향 냄새를 강하게 뇌리에 세뇌시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술 익는 냄새가 풍기던 내 고향, 구린내 같은 된장 뜨는 냄새가 그윽하던 시골집 내 고향, 몸속 가득히 스며들어 언제든 그리워하고 언제든 되뇌게 하는 고향의 향기는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추운 겨울날 따끈하게 데워진 안방 아랫목에 누운 것처럼 고향은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곳이다.

어리고 철없을 땐 고향을 떠나고만 싶었었다. 아니 떠나서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다고 느낀 적도 많다.

그런데 불혹의 나이를 넘어 지천명을 넘기고 나서부터는 자꾸만 고향 냄새를 맡게 된다. 그리고 새삼 고향이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심지어 촌스럽던 고향 친구들이 보고프다. 고향 친구들을 만나면 친정 엄마같이 편안하다. 어릴 때 놀던 고향 친구들은 이해타산 없이 그저 놀면서 싸우면서 정이 든  친구들이다. 40년 만에 만났는데도 어색함이 금방 가실 정도로 익숙한 친구들이다.

언제 들러도 변함없이 그곳에서 나를 받아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고향은 진정 내 마음의 안식처다.

15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고향집에 가서 눈을 감고 싶다며 병원 응급실에서 당신 손으로 산소호흡기를 떼고는 병실을 내보내 달라고 하셨었다. 하지만 암 말기 시한부 환자 셨기에 아버지는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신 채 눈을 감으셨다. 철없던 자식들은 고향에 가고 싶어 하시던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아니 고향이 어떤 의미인지 미처 느끼지 못했었다. 그저 젊음의 시절을 지내느라 고향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젊음이 끝나고 인생의 뒤안길을 회상할 날을 맞이할 즈음엔 고향의 고마움과 그리움을 느끼게 된다는 걸.



작가의 이전글 들풀처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