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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eong Oct 20. 2022

가난한 부모가 바라는 첫째 딸의 역할

첫째 딸은 살림 밑천이다

다자녀로 태어난 60년대생까지는 맏아들이나 맏딸들은 은연중 대리 부모 역할을 강요받았던 것 같다. 특히 60년 대생들이 성장하던 시기는 대체로 가난을 경험하던 시대다. 물론 전쟁 직후에 태어난 세대에 비하면 부요해졌지만 말이다. 6.25 전쟁으로 인한 가난이 시간이 흐르면서 안정화되어가던 60년대는 베이비붐 시대라고도 한다. 전쟁으로 인구가 많이 줄었으니 되도록 아이를 많이 낳아 복원을 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어렸을 당시는 한 가구에 자녀가 최소 4명 이상이었고 많게는 7~8명까지 있었다.

 

자녀가 많으면 많을수록 가난한 집에서는 아이들에게 돌아갈 혜택이 줄어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교육비나 양육비를 고스란히 부모가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형제자매가 나를 포함하여 다섯 명이다. 적지 않은 숫자였다. 농촌에서 부모님이 아무리 열심히 일하셔도 물려받은 것 없이 자수성가하는 입장에선 쉽게 생활을 펼 수가 없었다.

부모님은 은근히 첫째 언니에게 동생들 돌보는 일을 떠맡길 때가 많았다. 동생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언니를 혼내셨다. 첫째 언니는 아홉 살 때부터 밥 짓기를 시작했다고 했다. 등에는 막내 동생을 업고서 엄마가 귀가하실 때까지 집안 일을 도맡았다. 물론 동생들에게 역할을 나누어 시킬 때도 있었지만 모든 책임은 첫째 언니 몫이었다.


우리 다섯 남매들은 어려서부터 맏언니를 중심으로 사이좋게 지내왔다. 맏언니는 부모님보다도 동생들에게 든든한 울타리였다. 맏언니가 결혼하고 신혼생활을 할 때도 언니의 집엔 동생 한두 명이 얹혀 지냈다. 대학교에 진학하여 자취를 해야 하는 동생들을 언니 집으로 들어오게 하여 언니의 보살핌을 받게 했다.


어느덧 언니도 중년이 되고 동생들이 언니의 보살핌으로부터 독립하여 지내게 되었을 때였다. 부모님처럼 든든한 울타리 같던 언니와 동생들이 중년이 되어 언니와 함께 늙어가는 처지가 되었다. 우리 남매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맏언니와 함께 했던 성장기 추억을 들추며 언니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맏언니가 입을 열었다.

"내가 왜 그리 살았나 모르겠다. 나도 남들처럼 부모님에게 보살핌을 받으며 아이다운 시절을 보내고 싶었는데..."라고 말이다.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언니의 처지가 버거웠다는 것이다. 언니는 친구들이 고무줄놀이하고 오징어 게임을 할 때도 등에 아이를 업고서 구경만 했다고 한다.


언니는 부모님이 요구하시면 반항은커녕 한 번도 거절하지 못하고 부모님 말씀에 순종했던 착하고 믿음직한 딸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엄마는 요양사의 도움을 받을 만큼 연로해지셨는데 언니는 뒤늦게 후회하며 엄마에게 넋두리를 한다.

"엄마, 왜 어린 나한테 그렇게 무거운 짐을 지워 줬었어? 나 후회된다고! 왜 그때 반항도 못하고 지금까지도 엄마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지... 이젠 나도 내 인생 살고 싶다고!"

 

언니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자매끼리 함께 눈물을 쏟을 때도 많았다. 그때마다 난 속에서 울화가 터지면서 언니에게 소리 없이 외친다.

"언니야, 아닌 건 아니라고 따끔하게 거절을 했어야지. 사춘기 때 등에 아이 업고 지내지 말고 친구들과 놀러도 다니고 가출도 해보고... 부모님의 몫은 부모님에게 돌려드렸어야지..."


언니는 아직도 중장년이 된 동생들을 염려하고 연로하신 엄마를 보살피기까지 맏이의 몫을 톡톡히 하며 지낸다. 그 바람에 동생들은 여전히 언니에게 많이 의지하며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재차 언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젠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닌 언니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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