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한 학년에 2 학급이었고 한 학급에 40명 정도였다. 우리 반은 남학생이 22명, 여학생이 18명으로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운동장에서 고무줄놀이나 줄넘기놀이를 할 때는 여학생끼리 18명이 한꺼번에 편을 갈라서 놀았다. 그러니 그때는 학교에서 왕따라든가 소외되는 아이가 없었다. 간혹 놀이할 때 편먹기 했던 아이들이 평소에도 두 패로 나뉘어서 친해지는 일은 있었지만 말이다.
돌아보면 초등학교 시절은 즐거운 추억들이 많다. 여름엔 수박서리, 가을엔 밤 서리, 겨울엔 고구마 서리... 이 글을 읽으며 웬 구닥다리 같은 옛이야기냐고 생각할 독자도 있겠지만 내 나이를 대충 가늠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 같다.
내가 어렸을 적 배고픈 아이들이 무심코 밭도랑을 지나다가 탐스럽게 열린 수박을 보고 "얘들아, 우리 수박 서리할까? 그러자!!"라고 몇 명이 동의하게 되면 아이들은 거침없이 밭으로 들어가 수박을 땄다. 그리고 수 풀진 곳으로 들어가 수박을 깨고 한입 먹을라치면 여지없이 들려오는 수박 밭주인 아저씨의 고함소리다.
"야, 이놈들아, 거기 있거라! 내 이놈들을 가만두지 않을 테다!" 소리소리 지르며 금방 달려와 멱살잡이라도 할 것 같지만 막상 주인아저씨는 혀만 찰뿐 아이들을 어찌하진 못했다. 지금처럼 배고픈 아이들이 편의점에서 소부르빵 한 개 훔쳐먹었다고 절도범이니 소년범이니 하면서 범죄자 취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에휴 저만할 때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서리를 했을까!"라고 속상한 마음을 삭히며 야단은 쳤어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아이들을 품어주었던 것 같다. 그러니 커서 어른이 되었어도 미안하고 철없었던 시절을 돌아보게 되고 고향 어르신들을 내 부모님처럼 존경하게 되는 이유다.
6학년 때 일이다. 가을 땡볕에서 운동회 연습이 한창이었는데 한 친구가 제안했다.
"얘들아, 오늘은 우리 단체전 연습이니 몰래 빠져나가서 밤 서리하러 가자!"
고함치고 꾸중하는 체육선생님의 목소리도 지겹고 운동회 연습도 버거웠던 아이들은 친구의 제안에 두말할 나위 없이 동의하며 살짝 5~6명이 운동장을 벗어나 학교 뒷산으로 갔다. 누가 손대지 않은 학교 뒷산에 밤나무가 가득했는데 추석을 갓 지낸 가을이니 주먹만 한 알밤 송이가 입을 쩍쩍 벌린 채 땅바닥에 나 뒹글고 있었다. 우리는 손에 가시가 찔리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알밤을 주워서 주머니 여기저기에 넣고도 모자라 윗도리 앞자락에 가득 담아서 개구멍을 통해 학교로 간신히 돌아왔다. 그리고는 아무도 없는 교실로 들어가 가방에 주운 밤을 넣고는 운동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우리 담임 선생님께서는 연습시간에 아이들이 사라졌다는 체육선생님의 전갈을 듣고는 우리 반 아이들을 운동장에 줄 세워 놓고 사라진 아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종례를 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런데 마침내 밤 서리꾼 아이들은 담임 선생님께 운동장에서 딱 걸린 것이다. 그날 우리는 날이 저물도록 귀가하지 못하고 1시간 가까이 체벌로 "엎드려뻗쳐"와 반성문을 쓰고는 뒤늦게야 하교를 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6년 동안의 추억거리를 적으라고 하면 책으로 열 권도 더 엮을 수 있을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을 마치고 중학생이 되니 사춘기에 접어들었던 것 같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하기 전엔 친구들과 어울려 함께 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땐 학원 문화가 흔치 않던 시절이라 학원은 스카이대 준비생들이나 가는 곳으로 인식되었을 때다. 생각보다 중학생들이 갈만한 곳은 전무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예닐곱 명의 방황하는 중학생들은 학교 앞 포장마차 아니면 인적이 드문 뒷동산에 모여 수다를 떨거나 흥미로운 게임에 빠져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물었다.
"너희들 외박 가능하냐"
"외박은 왜? 어디서?"
"내일 우리 부모님이 동생들 데리고 친척집에 가시거든. 그래서 나랑 언니 둘 뿐인데 언니는 늦게 귀가해서 너희들 놀러 와도 돼."
"와우, 그럼 내일 친구네 집에서 뭉치자!"
다음날 네 명의 소녀들이 무단 외박을 했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에 네 명의 소녀들은 밤새도록 무엇을 했을까? 고스톱 게임 초보자들이 동전내기로 빠져들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새벽녘까지 웃고 떠들며 놀다가 동이 틀무렵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한나절을 지나간 후에야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가려니 부모님 허락도 없이 외박한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방황 소녀들은 종아리에 회초리 맞을 준비를 단단히 하고는 귀가했다. 그런데 정작 어이없게도 우리 부모님들은 내가 외박한 사실도 모르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고스톱 이야기도 꺼낼 수 없었고 마음 졸이던 순간들은 가슴 한구석 언저리에 묻혀버렸던 것이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신입생들에게 선배들이 술을 권하는 자리가 흔했다.
알코올에 취약한 학생들은 술 때문에 돌연사를 겪는 일들도 가끔씩 뉴스에 나오곤 했었다.
하루는 시험을 하루 앞두고 같은 과 친구와 시험공부를 하다가 친구와 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까지 술이라는 걸 마셔본 적이 없는 숙맥이었다.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했기에 술에 대한 관심조차 가져본 일이 없었다. 친구와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못을 하고도 술 마셔서 한 행동이라고 하면 너그러이 이해를 해주는 분위기니 도대체 술이 지닌 비법이 뭘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날 친구는 비장한 제안을 했다. 이제 우리도 성인이 되었고 시험공부도 마쳤으니 술맛이 어떤지 경험해보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겁이 났고 다음날이 시험일이니 다음 기회로 미루자며 거절을 했다. 그런데 친구는 마침 자기 집에 부모님이 곡물로 담가놓은 곡주가 있다고 했다. 친구는 도자기병에 담아놓은 곡주 한 병을 꺼내와서는 이건 그리 독하지 않을 거라며 한사코 마셔보자는 것이다. 친구의 권유에 못 이겨 한잔을 받았는데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에구 이게 무슨 술이야? 둘이서는 주고받고 하면서 여러 잔을 들이켜다 결국 취해서는 기억을 잃고 말았다. 물론 다음날 시험도 치르지 못한 채 해롱거렸다. 난생처음 경험한 술맛 때문에 얻은 결과는 낙제라는 쓰디쓴 경험을 했지만 다행히도 재시험 기회가 주어져서 위기는 면하였었다.
친구와 난 무언의 약속을 한 것처럼 그날 이후 그날의 해프닝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둘만이 간직한 비밀 추억이 된 것이다.
지나간 추억을 떠올리니 어린 시절 내 모습은 여전히 다른 사람의 제안이나 설득에 완강히 거절하지 못하는 지나치게 겸손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존중하고 내 생각을 꺾음으로 얻은 결과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잘못된 결과 모두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려는 건 아니다.
다만 이런 성격이 나의 자존감과 관련된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자존감 향상을 위해서 당당히 거절하는 힘도 길러야 하는 건 아닌지 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