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화] 소란스러운 밤, 거짓말처럼 서로를 알아본 순
그녀의 단단함에 압도되어 숨이 턱 막혔던 그 순간. 하지만 사실, 내 마음의 빗장이 먼저 풀린 건 그 무거운 '진로 대화' 때문이 아니었다.
시간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보자. 우리의 첫 만남은 비장함보다는,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 섞인 '웃음'으로 시작되었으니까.
"안 내면 진 거, 가위 바위 보!"
탄식과 환호가 엇갈렸다. 바다 바로 앞 야외 바비큐장. 우리 테이블엔 형과 나, 그리고 그녀를 포함한 21살 동갑내기 친구들 셋. 총 다섯 명이 앉아 있었다. 하필이면 고기 굽기 내기에서 그녀가 걸렸다.
"아, 망했다. 나 고기 진짜 못 굽는데..."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집게를 집어 들었다. 방금 전 내 폐부를 찔렀던 '야망 있는 대학생'은 온데간데없고, 내 눈앞엔 그저 고기 굽는 게 걱정인 앳된 소녀가 서 있었다. 그 갭 차이 때문이었을까.
"이리 줘. 내가 구울게."
"어? 아니에요. 제가 걸렸는데."
"나 고기 굽기 경력직이야."
나는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집게와 가위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비큐장은 구조가 특이했다. 다 같이 앉는 사각 테이블이 있고, 거기서 서너 발자국 떨어진 구석에 고기를 굽는 대형 화로가 따로 놓여 있었다. 즉, 고기 굽는 사람은 시끌벅적한 테이블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연기를 뒤집어써야 하는 구조였다.
"고마워요!"
해맑게 손을 흔드는 일행들을 뒤로하고 화로 앞에 섰다. 치이익— 두툼한 목살을 석쇠에 올리자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테이블 쪽은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내가 서 있는 이곳은 타닥거리는 숯불 소리와 바로 뒤 방파제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뿐이었다.
마치 세상과 단절된 기분. 묵묵히 고기를 뒤집으며 연기를 피하고 있을 때였다.
타박, 타박.
누군가 자갈밭을 밟으며 테이블 쪽에서 내 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연기 속을 파고들었다.
"심심하죠? 혼자 굽게 해서 미안해서요. 말동무나 해드리려고."
그녀였다. 그녀는 매캐한 연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옆에 쪼그려 앉았다. 저쪽 테이블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순식간에 배경음악처럼 멀어졌다. 이 좁은 화로 앞, 뿌연 연기 기둥 아래에 우리 둘만 남겨진 기분이었다.
아까 나를 주눅 들게 했던 그 '진로 이야기'가 지나가고 나자, 그녀는 다시 영락없는 21살 대학생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때, 스피커에서 최신 아이돌 노래가 흘러나왔다. 내내 발라드만 흐르던 바비큐장에서 뜬금없는 선곡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어? 오빠 이 노래 알아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알지. 걸그룹 노래잖아. 내 입대 곡이었는데."
"헐, 대박. 여기 사람들 아무도 모르던데. 저 이 노래 진짜 좋아하거든요."
그녀가 반가운 듯 의자를 내 쪽으로 당겨 앉았다.
"와, 되게 신기하다. 나랑 플레이리스트 겹치는 사람 처음 봐요."
그 말 한마디에 소음은 배경음악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아껴듣던 노래'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대화의 티키타카가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물렸다.
나는 굽던 손을 잠시 멈추고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 플레이리스트 좀 탐나는데. 인스타 공유할래?"
"오, 좋아요!"
보통은 예의상 하는 말이었겠지만, 이번엔 진심이었다. 그녀와 좀 더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다른 친구가 다가왔다. "이제 제가 구울게요 둘 다 저기 가서 식사해요." 친구의 등쌀에 밀려 우리는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오빠, 나 오빠 MBTI 뭔지 알 것 같아."
"에이, 그걸 어떻게 알아? 나 꽤 어려운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입에서 정답이 튀어나왔다.
소름이 돋았다. 한 번에 맞춘 사람은 처음이었다.
"와, 대박. 어떻게 알았어?"
그녀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나랑 똑같아서요. 그냥 딱 보는데, 나랑 같은 과라는 느낌이 왔어."
그녀와 나. 정반대의 삶을 사는 줄 알았는데, 본질은 닮은 사람이라니. 그 말 한마디가 묘한 안도감과 설렘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어갈 무렵, 나는 내가 챙겨 온 '별빛 청하'를 꺼내려 했다. 주량 소주 반 병. 술이 약한 나에게 쓴 소주는 무리였으니까. 그때 그녀가 자신의 가방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한라산 소주와 얼그레이 시럽, 그리고 토닉워터였다.
"오빠, 이거 마셔봐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진짜 맛있어요."
그녀가 능숙하게 비율을 맞춰 내민 잔. 한 모금 넘기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알싸한 소주 맛은 온데간데없고, 달콤 쌉싸름한 홍차 향이 입안을 감돌았다.
"와, 이거 뭐야? 진짜 맛있다."
"그쵸? 내가 이걸로 영업 성공한 사람만 수십 명이야."
그날 밤, 나는 내 '최애 술'인 별빛 청하를 뚜껑도 따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타주는 '한라산 얼그레이 토닉'만 홀짝였다. 파도 소리는 BGM이 되었고, 달콤한 술과 그녀의 웃음소리가 안주가 되었다. 그녀에게서 아까의 '단단함'은 흐릿해지고, 어리숙하고 귀여운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1차 정리가 끝나고, 피곤했던 형들은 숙소로 먼저 들어갔다.
"우리는 저 앞 정자에서 2차 할 건데, 오빠도 갈래요?"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깜깜한 밤바다 앞 정자. 총 8명이 둥글게 모여 앉았다. 그녀는 잠시 숙소에 다녀와 조그만 과자 하나를 내 손에 쥐여주었다.
"이거 내가 아끼는 건데 오빠 하나 줄게"
그 작은 과자가 뭐라고, 입에 넣는 내내 기분이 달달했다.
"술 떨어졌다. 편의점 다녀올 사람?"
"저요." "나도 갈래."
우리는 자연스럽게 둘이서 편의점으로 향했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진 해안 도로. 그녀가 먼저 침묵을 깼다.
"오빠, 우리 이제 말 편하게 하자. 말 놓을게?"
"어? 어, 그래. 편하게 해."
한결 가벼워진 말투만큼이나 거리감이 좁혀졌다. 봉지를 달랑거리며 돌아오는 길, 그녀가 툭 던지듯 말했다.
"서울 가서도 우리 같이 놀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좋지. 연락해."
그렇게 파도 소리 속에서 우리는 많은 인생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내 주량은 이미 한계치를 넘어가고 있었다.
"나 이제 좀 어지러워서 들어가 봐야겠다."
"어? 나도 졸린데. 같이 가."
우리는 일행을 뒤로하고 숙소로 향했다. 나란히 걷는 밤길.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와 나눈 대화의 여운 때문인지 발걸음이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숙소 천장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귓가에는 파도 소리 대신 그녀의 웃음소리가 이명처럼 맴돌았다.
전역 후 처음으로, 내일이 오는 게 두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일이 기다려졌다.
아무것도 정해진 건 없었지만,어쩌면 내일 그녀를 우연히라도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하고도 강렬한 기대감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