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함은 우연보다 치밀하다

[03화] 정해진 길을 이탈했던 나의 선택

by 김선일

Chapter 03. 동생 한 번만 믿어줘라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천장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역대급 숙취였다. 보통 때라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루 종일 앓아누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늘 저녁, 그녀를 다시 만나기로 했으니까.


비틀거리며 편의점으로 향했다. 숙취해소제 네 캔을 샀다. 차가운 캔을 그 자리에서 물 마시듯 연거푸 들이켰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녀 앞에서 멀쩡하게 웃고 싶었을 뿐이다.


오전 일정은 '돌고래 투어'였다. 그녀는 친구들과 택시를 타고 먼저 북쪽으로 이동했고, 나는 형들과 차를 타고 해안 도로를 달렸다. 창밖으로 검은 등지느러미들이 보일 때마다 나는 반사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돌고래가 신기해서가 아니라, 어젯밤 새끼손가락을 걸었던 약속 때문이었다.


"나 돌고래 좋아해. 보면 꼭 사진 찍어줘! 약속했어요? 안 보내주면 서울 가서 찾아간다."


나는 흔들리는 차 안에서 가장 잘 나온 사진 한 장을 골라 먼저 전송했다.


[진짜 있네. 너 보여주려고 찍었어.]


그녀에게 답장은 금방 왔다.


[와 대박! 고마워! 우리는 지금 북동쪽으로 가고있어]


투어가 끝나고 문제가 생겼다. 제주의 날씨가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원래 계획은 동쪽 해안을 도는 것이었으나, 동쪽 하늘은 시커먼 먹구름에 덮여 있었다.


"야, 동쪽은 안 되겠다. 일단 북동쪽으로 피하자."


형들의 판단으로 우리는 북동쪽 해변으로 차를 돌렸다. 도착하니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졌다. 형들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야, 오늘은 날씨도 궂은데 그냥 여기서 좀 쉬다가 저녁엔 각자 자유시간이나 갖자. 피곤하다."

하늘이 도운 기회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들어 그녀에게 상황을 알렸다.


[우리도 동쪽이 비가 와서 북동쪽으로 가고 있어 형들이랑 저녁엔 각자 쉬기로 했어.]


답장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도착했다.


[정말요? 우리도 저녁엔 친구들끼리 찢어져서 자유시간 갖기로 했는데. 신기하다.]


마치 누군가 정교하게 맞춰놓은 퍼즐 같았다. 양쪽 모두에게 약속이나 한 듯 '빈 시간'이 생겨버린 것이다. 심지어 위치마저 지척이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나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나는 운명론자가 아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운명을 믿고 싶어졌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나는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잘됐다. 그럼 저녁 같이 먹을래?]


그녀에게 답장은 빠르게 돌아왔다.


[좋아! 이따 봐.]


완벽했다. 모든 상황이 우리를 위해 준비된 것만 같았다. 불안했던 마음이 설렘으로 꽉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오후를 보냈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거짓말처럼 동쪽 하늘이 맑게 개기 시작했다.


"어? 야, 저기 봐라. 날씨 풀렸다! 야, 자유시간 취소! 다시 동쪽 가자."


형들은 신이 나서 다시 동쪽으로 핸들을 꺾으려 했다.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유시간이 취소되면 그녀를 볼 수 없다. 심지어 우리가 동쪽으로 이동하면, 물리적인 거리마저 정반대로 멀어지게 된다.


차바퀴가 굴러갈수록 우리는 멀어지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내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이대로 가면 오늘 그녀를 못 볼 수도 있다. 겨우 맞춰진 타이밍인데, 오늘이 아니면 그 흐름이 끊길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동쪽으로 가는 길목.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들어간 식당. 음식이 나왔지만, 나는 도저히 삼킬 수가 없었다. 지금 이 밥을 먹고 다시 차를 타면, 그녀와의 거리는 되돌릴 수 없이 멀어진다.


달그락. 나는 숟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밥을 먹고 있는 형들을 비장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형."


"어? 왜? 맛없냐?"


정적이 흘렀다. 마른침을 삼켰다.


"형, 동생 한 번만 믿어줘, 나 다시 북동쪽으로 가야겠어. 걔 만나러 가야 돼. 오늘 아니면... 진짜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동쪽의 맑은 날씨. 다시 부활한 우리들의 단체 여행 계획. 그 모든 합리적인 이유들을 내던졌다. 나는 오직 '그녀' 하나를 택했다.


내 눈에 서린 간절함, 아니 광기를 읽었는지 형들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 녀석 봐라? 아주 제대로 미쳤구만. 가자, 가! 차 돌려!"


식당 창밖으로 보이던 동쪽의 맑은 하늘보다, 내 마음이 더 환하게 개었다. 우리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북동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멀어지던 네가,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맑은 하늘이 멀어지고, 흐린 북동쪽 하늘이 다시 다가왔다. 상관없었다.


이 유턴은 내 22살 인생에서 가장 비합리적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투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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